“경쟁사 비리 캐줘” 모사드 출신까지 고용, 첩보전 찍는 기업들

구아모 기자 2025. 12. 4.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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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소송 늘자 정보기관 접촉
이스라엘 ‘블랙큐브’도 韓 상륙

지난 2022년 국내 건설·엔지니어링 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업계 후발 주자인 A사가 중동의 한 나라에서 수조원 규모의 대형 국책 사업을 따냈기 때문이다. A사와 수주 경쟁을 벌였던 B사 경영진은 곧바로 A사가 수주에 성공한 경위 등을 파악하는 데 나섰다. 그런데 B사가 찾은 곳은 국내 대형 로펌도, 해외 유명 신용평가사도 아닌 외국 정보기관 출신이 세운 사설 첩보 수집 회사였다.

B사의 의뢰를 받은 첩보 수집 회사는 중동 현지에 유령 에너지 투자 회사를 만들고 사업 발주처인 해당국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게 접근했다. 식사를 겸한 면담 등을 통해 정부 관계자와 네트워크를 쌓아간 ‘요원’들은 몇 달 만에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했다. A사와 발주처 고위 인사 간에 부정 거래 정황이 담긴 녹취를 입수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B사는 A사와 물밑 협상을 벌였고 A사는 사업을 접기로 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법정 싸움으로 가면 몇 년이 걸릴 일을 몇 달 만에 해결한 것”이라며 “기업 간 분쟁에서 ‘휴민트’(인적 정보) 첩보전이 치열해지는 이유”라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한국이 외국에 투자하는 해외직접투자 규모는 작년 기준 639억5000만달러(약 90조원)로 세계 10위권이다. 이런 가운데 기업 간 분쟁이 빈발하고 글로벌 소송전까지 벌어지면서 해외 첩보 수집 회사들이 한국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작년 사설 국제 중재 기관인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를 찾은 625명(법인 포함) 중 한국 출신이 295명(47%)으로 가장 많았다.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기소되거나 제재 대상이 되는 일도 늘고 있다. 한 국제 분쟁 컨설턴트는 “돈이 움직이는 곳에는 정보전(戰)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한국이 해외 투자계에서 큰손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첩보 수집 회사들이 주목하는 시장이 됐다”고 했다.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해외 사업과 관련한 리스크 분석이 필요할 때 ‘크롤(Kroll)’ ‘컨트롤 리스크(Control Risks)’ 같은 외국 컨설팅 회사에 의뢰해왔다. 이 회사들은 주로 계약서나 재무제표, 보도자료 등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해외 투자 위험성 등을 검증한다. 그러나 이런 분석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기술 탈취, 담합 분쟁 등이 늘자 기업들이 첩보 수집 회사들을 찾기 시작했다.

한 국제 첩보 수집 전문가는 “검경 수사권 조정 등으로 한국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이 대폭 줄면서 경제·기업 관련 사건 수사가 일부 지체되는 현상을 겪는 것도 기업들이 첩보 수집 회사를 찾는 요인”이라고 했다.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경찰 등의 수사나 법원 재판을 기다리다가는 실기(失機)할 수 있다고 보고 기업들이 첩보 수집 회사에 의뢰해 사태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흐름 속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정보부대인 8200부대 출신 인사들이 설립한 블랙큐브도 최근 한국 시장에 발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블랙큐브는 40년 가까이 앙골라를 통치한 조제 두스산투스 전 대통령의 딸 이사벨 두스산투스 재산 20억달러(약 2조9300억원) 중 상당 부분이 국고를 횡령해 조성된 정황을 지난 2019년 밝혀내 유명해졌다. 블랙큐브는 주앙 로렌수 정부의 의뢰를 받아 이사벨이 해외에 설립한 유령 회사와 차명 계좌 네트워크를 속속들이 찾아냈다. 2017년엔 멕시코 국영 석유 회사 페멕스와 법적 분쟁 중이던 멕시코 유전 시추 업체 의뢰를 받아 페멕스 임원들의 부패 증거를 확보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블랙큐브는) 온갖 방법으로 비밀스러운 정보를 입수해 (해당 국가의) 규제 기관 조사까지 이끌어내고 있다”며 “정보 기관에서 익혔던 첨단 첩보 기술을 수조 원의 기업 분쟁에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에선 경영권 분쟁 상대가 해외에 은닉한 자산을 추적해 달라거나 기업 총수와 관련된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해외 서버 유튜버들을 추적해 달라는 의뢰, 합작을 하는 해외 파트너사의 부패·담합 여부를 파악해 달라는 의뢰 등이 들어온다고 한다. 블랙 큐브를 대리하는 미국 로펌 코브레앤킴의 이숭현 변호사는 “정보력의 격차가 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며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늘어날수록 다양한 루트를 통한 정보 수집 수요도 함께 커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업들이 법 테두리 안에서 경쟁사의 약점을 파고드는 ‘블랙(비밀 정보 수집) 활동’의 외주화가 활발해질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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