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배달원 이어 편집자가 주인공… “일은 세상 만나는 통로”

황지윤 기자 2025. 12. 4.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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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오직 그녀의 것’ 낸 김혜진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 해나가게 되거든요.’(253쪽)

박성원 기자‘오직 그녀의 것’에서 석주는 연인 대신 문학을 택한다. 석주와 문학의 로맨스(?) 소설로도 읽힌다. 다음 장편은 사람 간의 사랑을 다룬다. 김혜진은 “약간의 로맨스가 있는 중년들 이야기”라고 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설가 김혜진(42)의 신작 장편 ‘오직 그녀의 것’(문학동네)을 읽다가 밑줄 대잔치를 벌일지도 모른다. 묵묵히 일하는 이야기일 뿐인데도 말이다. 1990년대 초를 배경으로, 출판업계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 문학 편집자 홍석주의 삶을 따라간다. 얼핏 단조로울 법한 이 소설은 출간 두 달 만에 벌써 4쇄를 찍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김혜진을 만났다. 2012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소설책 10권을 펴냈다. 2017년 작 ‘딸에 대하여’가 세계 각국에 번역되고 지난해 영화화되면서 더욱 이름을 알렸다.

그는 석주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문학 편집자’라고 했을 때 딱 떠올릴 만한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책 뒤의 조력자. 석주 역시 “뒤에 있는 게 편하고 익숙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전형성이 아쉽지 않은 건, 통상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다. 말 없는 워커홀릭 내향인의 마음엔 소용돌이가 치고 있고, 그 중심엔 일이 있다.

김혜진은 일 이야기를 자주 썼다. 소설집 ‘어비’(2016)의 등장인물은 2030 비정규직이다. 인터넷 방송 진행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치킨 배달원 등. 장편 ‘9번의 일’(2019)은 26년 근속한 회사에서 저성과자로 분류된 통신사 현장팀 직원 이야기. 일이 삶이 되는 것은 바람직한가. 자아는 왜 일을 할수록 훼손되는가. 일의 어떤 면에서 긍지를 느낄까, 같은 질문을 붙들었다.

그는 “일이 저한테는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하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기도 하고, 일이라는 것을 통해 제가 세상을 만나잖아요. 이 세계가 어떤 것이라는 것도 정의하게 되고요.” 그는 “일을 빼면 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소설가는 “주인공 석주와 나는 다른 면이 많다”고 했지만 노동관은 공유하는 듯했다.

지난달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진 소설가./박성원 기자

그는 “편집자들이 읽었을 때 이 소설이 어떻게 보일까 조심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원고를 처음 본 담당 편집자는 “너무 정적”이란 피드백을 줬다. 이에 소설가는 “편집 노동의 세부를 더 찾아봤다”고 했다. “교정 보는 일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고 각종 연락·섭외·협의 등 모든 걸 감독하는 일이에요. 편집자의 일이 정적인 것만은 아니구나 알게 됐죠.” 잡지 ‘출판저널’과 과거 신문 기사 등도 참고했다. 소설 도입부의 교열부 이야기는 일본의 출판 기록물에 착안해서 썼다.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2년 조금 넘게 걸렸다.

소설엔 햇살이 유독 자주 비친다. 업(業)의 고단함이 묻어나지만, 희망적이다. 석주는 문학 편집자로 출근하는 첫날 지각하는데, 그때조차 책상에 빛이 어른거린다. 세계를 너무 낭만화한 건 아닐까. 소설가는 “낭만적으로 쓰고 싶었다”며 웃었다. “일부러 현실에서 살짝 띄운 느낌을 줬는데, 소설을 바닥에 내려놓게 되면 석주가 너무 힘들고 피곤해하고… 그러면 노동 실태에 대한 고발 소설이 될 수 있어서(웃음).”

그는 “우리가 일에 매몰돼 있기 때문에 일상에선 그게 보잘것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걸 띄움으로써 대단해 보이는 지점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편집자들을 응원하는 마음,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과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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