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농협 ‘성폭력 피해’ 29살의 지옥…“쉿, 출입문 비번도 알려주지 마”
천안농협조합 본부장 추행, 회사는 따돌림
농협중앙회-지역농협 서로 책임 미루기도

2025년 10월16일 충남 천안에 사는 박현이(29·가명)씨는 마침내 ‘피고 천안시농협조합, 아무개씨는 공동하여 1천만원을 지급하라’는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의 판결문을 받아들었다. 2022년 3월 회식 자리에서 발생한 임원급 본부장의 성희롱 사건 이후 3년7개월 만이었다.
사건 직후 본부장이 받은 징계는 없었다. 사건을 공론화한 박씨만 조직 내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당했다. 판결문도 사실상 승리라기보다는 패배의 기록이었다. 손해배상 소송 비용을 생각하면 위자료조차 남는 것이 없고, 더 이상 조직생활이 힘들다고 판단해 천안시농협조합에 이미 사표를 냈다. 직장 생활 5년차에 ‘성불평등 경력단절자’가 된 것이다.
연락처에 동료 이름을 ‘아빠’로 바꾼 이유
“비속어 ‘×나’를 섞어가며 ‘예쁘다’고 했어요.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만졌고요.” 박씨가 말했다.
박씨는 과거 천안시농협조합과 거래처였던 다른 회사에서 총무로 일했다. 박씨의 업무능력을 눈여겨본 천안시농협조합 직원이 채용 공고가 떴으니 지원해보라 권유했고, 박씨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사했다. 계약직이지만 천안에서 누구나 아는 회사인 농협에서 일하는 건 기회로 느껴졌다.
“급식지원 일을 했는데 천안 전 지역의 어린이집·유치원·학교에 식자재를 유통한다는 데 자부심도 있었고, 공공급식팀에서 큰 계약을 따올 때는 일도 재밌었어요. 사건을 겪고 정말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일이 싫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농협 정규직이 너무 되고 싶었으니 어떻게든 버텨보려 한 거죠. 유기농업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시험을 쳐서 정규직에 합격했을 땐, 그런 일을 겪은 뒤였지만 부모님도 좋아하셨어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그분(가해자인 본부장)은 파견직 임원이니까 버텨보자’ 했어요. 사건 뒤에도 회식 자리에서 마주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 생각했고요.”

당시 박씨는 본부장을 차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 또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1차 회식이 끝나고 집에 간 직장동료 전화번호를 휴대전화에서 ‘아빠’로 바꿨다. 직장동료는 전화를 걸어줬고 박씨는 본부장이 옆에 있는 동안 통화 상태를 유지했다. 박씨는 ‘아빠가 이제 다 왔다고 한다’고 둘러대고 나서야 비로소 차에서 내린 본부장이 끔찍하게 무서웠음을, 그 기억이 고통스러워 이후 차까지 바꿔야 했음을 이야기했다. 1차 회식 성희롱 목격자이던 전 천안시농협조합 직원 ㄱ(33)씨는 이렇게 말했다.
“회식 자리에서 그분이 계속 (박씨를) 따라다니면서 껄떡대는 거예요.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어요. 이전에도 어깨동무하고 얼굴 가까이 대고 말한다든지, 팔을 주무르거나 계속 장난을 건다든지. 저한테도 어느 날은 자기 엉덩이로 제 엉덩이를 장난하듯이 치고. 그런데 저는 일부러 (장난처럼) 역이용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너무 화나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사무실 비밀번호 숨기며 따돌림
박씨 사건 판결문에는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해 원고에게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 2호의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하는 불법행위)”였음이, 따라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음이 지적돼 있다. 그러나 결말은 박씨의 절망이다. 박씨는 회사가 가해자와 자신을 분리해주지 않는 상황을 스스로 바꿔보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에 회사의 조사의무 위반, 보호조치의무 위반, 행위자조치의무 위반에 대해 진정을 냈다.
고용노동부에 분리를 위한 보호조치를 스스로 요구해 2024년 7월부터 2025년 1월까지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지만 그사이 ‘은따’는 더 심해졌다. 엄연히 박씨도 회사 직원인데 직장동료는 그에게 사무실 출입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본부장과 가까운 사내 관리자는 박씨의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검색해 보거나, ‘너 또 거짓말하네’란 식의 의심과 폭언을 이어갔다. 2025년 ‘학교급식 최우수농협 선정’이란 외피는 허울에 불과했다.
천안시농협조합은 “(본부장이 파견직이었기 때문에) 저희한테는 내부 징계 권한이 없고, (본래 소속인) 입장농협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입장농협은 “진행 중이다. 입장농협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농협중앙회에서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농협중앙회는 조합감사위원회 사무처(조감처)가 징계 조치를 내렸는지 묻자 “조감처는 징계 사항을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고 전했다. 박씨는 “3년이 넘었는데 대체 언제까지 진행 중”이냐고 말했다.

성희롱이 일상인 여성의 삶
지역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옥수수(필명)는 의사가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라고 인사하는데 웃지 못하고 놀랐다. ‘난 계약직인데 임신해도 될까’란 생각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입사할 때 면접관이 “지원자는 기혼이네요? 우리 회사는 임신하면 퇴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출산휴가를 쓸 수 없는 환경과 사직서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병원 간호사인 묵은지(필명)에겐 성희롱이 일상이다. 환자가 자신을 불법촬영하고, 팔을 주무르고, 주물러달라 하거나 자신을 보며 음란영상을 봤다. 그는 “이런 것들이 가장 빈번하고 이 외에도 껴안기, 몸 품평들이 있다”고 썼다.
빵공장에 일하러 간 초이(필명)는 열심히 손을 움직이지만 5초에 한 번씩 사람들이 혼냈다. 오전 노동에 지쳐 점심 식사를 마치면 니코틴·카페인·알코올 따위가 생각났다. 쉬는 시간에 담배를 야외에서 피웠다. 그런데 지나가던 공장 사람이 “아가씨! 여자들은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워야 해. 아무래도 여자는 안 보이는 곳에서 피우는 게 좋지”라고 말했다.

한국 청년여성 자살률 55개국 중 1위
실제로 고려대 이요한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교수팀은 2025년 11월 청년여성(20~39살) 자살률이 전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을 국제학술지 ‘예방의학’에 게재했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망통계와 유엔(UN) 인구자료로 2001~2020년 55개국 청년 자살률을 분석한 결과였다. 한국 청년여성 자살률은 2016년 이후 매년 8% 이상 늘어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고, 2020년엔 인구 10만 명당 18.9명으로 일본(12.0명)과 미국(6.8명) 등 주요국을 크게 앞질렀다.
박 연구원은 이와 관련해 “1990년대생 여성노동자들은 민주화 이후 출생한 첫 네이티브 민주화 세대로 초·중·고 과정에서 당연했던 평등한 환경이 직장생활에선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고 있다”며 “가족사에서도 남성 성씨 대물림, 감정쓰레기통 역할 등 비가시적인 이중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상급자가 주로 가부장적 조직문화를 경험한 남성들인 상황에서 민주적이고 주체적 가치관을 가진 여성노동자가 직장에 진입했는데, 이들은 직장생활 전부터 성차별을 경험한 이전 세대 여성보다 “더 큰 상처를 받는다”는 설명이었다.
김지혜 한국여성노동자회 부대표는 “고립감을 느끼는 1990년대생 여성들에게 이 문제가 개인적 문제가 아님을, 구조적 문제임을 알리는 게 우선”이라며 “이들이 직장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용평등상담실’ 같은 기관들의 상담, 입법, 운동 등 다각도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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