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닫으며] 산골 집에서 보내온 효재의 연말 이야기 | 전원생활

해 지는 줄 모르는 자연 속 소꿉놀이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12월호 기사입니다.

남다른 안목과 살림 솜씨로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효재(이효재). 지금은 충북 괴산 산골에서 자연과 벗하며 산다. 호젓한 살림살이는 그의 손길을 만나 따스하고도 정갈한 멋을 입는다. 연말이라고 왁자지껄할 일 있으랴. 언제나처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집 안팎을 매만지고, 겨울 풍광이 잠시 머물다 가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먼 길 마다 않고 온 손님들에게 별처럼 반짝이는 추억 한 조각 선물한다. 한 해를 보내고 다음 해를 맞이하는 12월, 효재의 산골 소꿉놀이는 해 지는 줄을 모른다. 

“어디 사세요?”라고 물어보면, “서울이요”가 아니라 “산 밑에 살아요. 뒷산이 국립공원이에요. 밤이면 고라니가 내려와 배추밭에 그물망을 쳐야 해요.”라고 한다. 전에는 뉴스 일기예보에 ‘산간지방 폭설’이라 하면 무심히 흘려들었던 그 산간지방에 살고 있는 거다. 도시에선 연하장 준비하고, 신년 계획 세우는 들뜬 연말에도 산속 살림은 다르게 분주하다.

집 안 정리,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괴산 산골짜기 작은 집 이름이 불누재(不陋齋), 누추하지 않다는 뜻이다. 혼자 사는 자취생 살림이니 단출해야지. 큰 가구는 가당치 않다. 살림살이를 감출 데가 없으니 무엇 하나를 놓아도 수십 번을 더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옮겨 놓는다. 꼭 맞는 제자리를 찾아주면 장식품인 양 근사하지만, 저마다 살뜰한 쓰임이 있는 물건들이다.

불누재에 들어서는 이마다 첫마디가 “저 바구니에 뭐 들었어요?” 가리키며 물어본다. 미니멀로 산다고 우기지만 커피 캡슐은? 당 떨어질 때 사탕은? 말린 농산물은 어디다 보관하지? 고민 끝에 대나무 걸이 만들어 들밥 바구니에 매달아두었다. 내려서 뚜껑 열고 보여주면 ‘옴마야’ 웃게 되는 말린 간식 정리함이다.

요즘 사랑에 빠진 소품은 김환기 화백의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달항아리 백자 편병이다. 백자 편병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빈집을 따뜻하게 만든다. 작가의 손길이란 공기를 디자인하는구나. 끝물에 다다른 감국을 꽃아두고 “아 행복하다” 한다.

미슐랭 부럽지 않은 산골 밥상

산골 집 도착할 때면 모두가 허기져 있다. 효재네에 가서 그림 같은 밥 먹겠다고 기대하며 휴게소 건너뛰고 오면 뭐든 맛있다. 배고파 기다리는 사람 생각하면 7첩 못지않은 일품요리가 온도 맞춰 급하게 내기에 적당하다.

찬 하나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으뜸이 가자미식해다. 국 대신 말차에 뜨거운 물 부어서 향기와 함께 밥부터 내준다. 밥을 먹는 동안 우리 집 냉동실에 1년 내내 떨어지지 않는 단골 식재료인 문어를 꺼낸다. 책받침 두께로 얇게 썰어 청양고추만 넣고, 갓 짜낸 들기름 뿌려내면 다들 아구아구 식탐하며 먹는다. 부재료가 주인공이 되는 문어라면도 뚝딱 끓여낸다.

언제나 지퍼 백에 얼려놓는 해창막걸리도 ‘웰컴주’로 건넨다. 마당에 있는 칡넝쿨에서 따온 잎으로 잔을 감싸주면 별것 아닌데도 모두 좋아한다. 칡넝쿨은 괴산살이 최고의 장난감이자 소품이다. 접시로 쓰고, 테이블에도 두르면 이만한 사치가 없다.

배춧속이 들어찰 즘이면 마을 공기가 술렁댄다. 배추 걷어 소금 절여 건져내고, 헹군 다음 소쿠리 밭쳐 물을 빼놓느라 분주하다. 그사이 앞치마 챙겨 든 딸들이 도착해 웃음꽃이 핀다. 싱겁네, 짜네, 맵네, 미슐랭 심사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녀간다는데, 이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섬세하게 맛 평가를 하는지? 우리네 여인들에게는 김치에 관해서만큼은 미슐랭을 넘어선 미식의 섬세함이 있는 거다.

앞집 형님네서 손바닥만 한 꿀배추로 담근 김장 한 통 받아서 저장고에 넣고 친구들을 부른다. 생김치와 따끈하게 데운 탁주 먹으러 오라고. 김치가 익어가고 친구들의 산골 발길이 잦아들면 한 해가 마무리된다.

보자기꽃으로 감싼 정성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선물 주고받을 일이 줄줄이다. 골 깊은 산속 집에 올 때는 술술 풀리라고 휴지도 들고 오고, 와인, 올리브, 빵이며 온갖 것들을 가지고 온다. 산속에서는 뭐든 귀하고 고맙다. 보낼 때는 뭘 들려 보내지? 고민하게 된다.

계절 없이 좋은 거가 국수 선물이다. 묵혀 먹어도 좋고 지인에게 ‘되선물’ 해도 좋다. 김치전이나 이런저런 전 부칠 때 국수 분질러 넣으면 맛있다고 요리 팁까지 일러준다. ‘다가오는 한 해도 언제나 잔칫날 같기를.’ 예쁜 보자기 골라서 보자기꽃 만들어 건네주면, ‘쇼핑백 하나 안 쓰고 나무 한 그루 심은 거다’고 내가 내게 칭찬한다.

풀담 위에 흰 눈 쌓이기를 기다리며

명색이 국립공원을 뒷산으로 두고 살고 있는데, 서울살이와는 다르게 못 해본 걸 하리라. 한 해는 토끼풀을 심어보고, 이듬해엔 들깨를 심었지만 마사토에선 잡초가 먼저 자라 쑥밭이 되었다. 동네 시끄럽게 굴착기까지 불러 뿌리를 캐 심어둔 억새는 두 해 만에야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게는 마을 정자나무만큼이나 귀하다.

담이 없는 동네지만 경계는 있어야 했다. 억새를 피해가며 내 키만큼 기다란 쑥대들을 잘라서 마당 한쪽 경계석 위에 쌓아 ‘풀담’을 만든다. 나 혼자 사부작거리며 하는 일이니 풀담이 완성되려면 한참 멀었다. 그사이 눈이 내려주려나. 겨울 정원에 눈이 쌓이면, 새들이 먹이를 찾아 푸드덕거리며 날아든다. 고라니 안부를 걱정하며, 묵은쌀 얻어다가 새 모이 뿌려주며 연말을 보낸다.

“내년에도 모이 많이 줄게. 또 만나. 큰 새 조심하고.”

이효재는?

한복 디자이너이자 보자기 아티스트이며 자연주의 살림법을 전하는 라이프스타일리스트이다. 현재 충북 괴산에서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펴낸 〈효재按酒〉 〈효재語〉는 요리와 일상 속 풍류, 삶의 철학 등을 담았다. 그 밖에도 〈효재의 살림풍류〉 〈효재처럼 살아요〉 등의 저서가 있다.

글 이효재 | 사진 임승수(사진가) | 진행 길다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