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진 ‘극우’와 ‘보수’의 경계, 사선 위에 선 국민의힘 [계엄 1년, 대한민국②]
“李-與 폭주에 맞서야” 인식 강해…‘윤 어게인’ ‘부정선거 세력’ 포용론도
정당 지지율 민주당에 ‘더블스코어’ 열세…중도층에서는 격차 ‘3배’ 육박
‘음모론’에 빠진 국민의힘…‘노인과 영남’의 정당으로 점점 쪼그라들어
(시사저널=박성의 기자)
2024년 12월3일, 시민들이 불법계엄에 맞섰다. 정지된 민주주의를 맨몸으로 지키겠다고 나선 시민들의 용기와 결심이 모였고, 그렇게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는 다시금 바로 세워졌다. 그렇다면 이렇게 끝인 걸까. 모든 것은 원점으로, 정상으로 돌아간 것일까. 불법계엄의 명분으로 내세워졌던 부정선거 음모론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퇴출됐을까. 음모론은 여전히 힘이 세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는 데서 시작한다. 음모론은 어떻게 불법계엄을 잉태했고,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뒤흔들었을까. 《시사저널》은 12·3 불법계엄 1주년을 맞아, 계엄의 뿌리로 작동했던 부정선거 음모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윤석열이 없었다면, 그가 비상계엄을 하지 않았다면, 국민의힘은 지금과 달랐을까. 정치에서 가정법은 공허하다. 그러나 이 질문은 보수 위기의 출발점을 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비상계엄 전에도, 윤석열이 당을 나간 뒤에도, 사법리스크에 휩싸인 정적의 위기는 계속됐지만 국민의힘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그들은 왜 '노인과 영남의 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2·3 비상계엄 1년이 지난 지금,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대가를 국민의힘은 '정당 해산 위기'라는 이름으로 치르고 있다. 윤석열 대선 캠프 관계자, 국민의힘과 민주당 의원, 정치권 원로와 학자, 비상계엄 당일 국회를 지킨 보좌관 등의 이야기를 통해 보수 위기의 근원을 짚어봤다.
"민주당이 계엄 불렀다"는 주장…'반윤' 압도하는 '반명'
2024년 12월3일 그날의 윤석열과 2025년 12월3일 지금의 국민의힘을 잇는 끈이 있다면 바로 '반명반민(反이재명·反민주당)'이다. 이들의 인식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법리스크에 휩싸인 이재명을 방탄하기 위해 △민주당이 의석수를 앞세워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를 장악하면서(장악하려 하면서)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된 것이다."(2024년 12월3일, 윤석열 전 대통령 계엄을 선포하며)
계엄 후 국민의힘에서 '반성문'이 쉽게 나오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대목에 공감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윤 어게인' 세력뿐 아니라 국민의힘 지도부도 이 같은 주장에 일부 힘을 싣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민주당의 의석 우위를 앞세운 입법 강행이 불러온 '정치적 사고'였다는 주장이다.
"민주당의 의회 폭거와 국정 방해가 결국 계엄을 불러왔다. 계엄을 통해 민주당의 무도함이 드러났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청년이 대한민국의 위기를 알게 됐다."(2025년 11월28일,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대구 장외집회에서 )
실제 민주당의 입법 독주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진영을 막론하고 이어져왔다. 비상계엄 선포 직전인 지난해 11월28일, 민주당은 최재해 당시 감사원장 탄핵 소추 추진 방침을 밝혔다. 감사원장 탄핵소추가 추진되는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 검사 3명의 탄핵도 예고했는데, 추후 이들의 탄핵안은 헌법재판관 8대0 전원일치로 모두 기각됐다. 최근에는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논란으로 이 대통령의 사법리스크가 재부상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상당수 지지층 "반명이지만 부정선거는 믿지 않는다"
대선 득표율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과 민주당을 향한 견제, 비판의 목소리가 대한민국 유권자 절반에 육박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민심을 구체적으로 뜯어보고 살펴보면 국민의힘이 '반명' 전략을 고수하는 것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는 얘기다.
앞서 윤 전 대통령 파면 속에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는 이재명 당시 민주당 후보는 1728만7513표로 전체 49.42%를 득표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패했던 지난 20대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가 얻었던 득표율(1614만7738표, 47.83%)에 비해 약 100만 명 정도의 표를 더 얻은 셈이다. 다만 '탄핵 역풍'을 고려하면 아쉬운 결과라는 분석이 민주당 일각에서도 나왔다. 기호 2번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41.15%)를 8.27%포인트(p)차로 앞서며 대권을 쥐었지만, 개혁신당의 이준석 후보 득표율(8.34%)을 합산하면 산술적으로 친명(親이재명)과 반명 유권자가 호각세를 보인 셈이다.
이에 국민의힘 내 적지 않은 의원들은 '비상계엄에 대한 사과'가 아닌 '비상계엄의 원인'에 보다 더 집중해야 하고, '윤석열과의 절연'이 아닌 '이재명과의 대결'을 통해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명'이라는 큰 교집합을 교두보 삼아 '보수의 반격'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저희가 넓게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사람 싫다, 저 사람 싫다, 이쪽은 너무 오른쪽이다, 이쪽은 어떻다' 하면 우리가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우리 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걸 '당신들은 윤 어게인, 부정선거(론자)니까 안 된다'고, 우리가 내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2025년 11월19일,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 SBS라디오에서)
문제는 민심의 흐름이다. 대선 당시 드러난 반명 표심을 국민의힘은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달 24~26일 사흘간 만 18세 이상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42%로 국민의힘 지지율(22%) 2배에 근접했다.
선거의 캐스팅보터인 중도층만 놓고 보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진다. 중도층의 경우 민주당 지지율은 38%, 국민의힘 지지율은 13%였다. 지역별 조사에서는 보수 텃밭인 TK(대구·경북)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민주당에 열세를 보였다. 연령별 조사에서는 국민의힘 지지율이 높게 나온 것은 70세 이상이 유일했다. 국민의힘이 '영남과 노인의 정당'이 되어가고 있다는 위기론이 실제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휴대전화 가상번호를 이용한 전화 면접,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 응답률 16.5%,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반명'이라는 느슨한 공통분모로 묶여 있던 보수의 부실한 연결고리가 대선 후 허물어진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른바 '부정선거론'과 '윤 어게인'식 강경 메시지를 거부하는 보수 유권자들이 적지 않음에도, 국민의힘이 이들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못하면서 지지층의 이탈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국힘당 당원들의 과반수, 보수층의 절반 가량이 부정선거 망상자라면 그 비율이 5%밖에 안되는 진보세력을 이길 방법이 없다. 망상자들이 뭉쳐서 '윤 어게인' 후보로 대선과 지선 말아먹고 정치무대에서 사라져야 비로소 보수재생의 길이 열릴지 모른다."(2025년 11월28일,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조갑제닷컴》 통해)

보수의 반등은 가능할까…"정쟁 아닌 정책으로 승부해야"
국민의힘 내부에선 당이 '거대 여당의 폭주'를 거듭 비판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힘이 센 민주당을 만든 것이 바로 국민의힘'이라는 자조섞인 분석도 나온다. 당심을 앞세운 국민의힘이 총선 3연패를 거듭하는 사이, 민주당은 민심을 뒷배로 '보수와 타협할 이유'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남·TK 중심의 기득권 지지층과 '윤 어게인' 세력만의 지지를 얻은 국민의힘 일부 중진·지도부가 변화를 거부하면서, 당 안팎의 혁신 요구가 들어설 공간이 사라졌다는 비판이 당 일각에서 제기된다.
"총선만 3연패이고 대통령 2명이 탄핵 당했는데 당은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다. 그 와중에 '나'는 살았기 때문이다. 당은 이제 고장 난 화재경보기가 됐다. '위험 경보'가 울려도 믿지를 않는다."(20대 대선 당시 윤석열 캠프 핵심관계자)
"얼마 전 우리방 영감(의원)이 중진 의원들과 오찬을 하고 왔는데 하는 말이 '훈장님과 대화하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 진단부터 제대로 되어야 처방이 나오는데, 지금은 당 어른들이 진단 자체를 제대로 못 하는 모습이다."(국민의힘 초선 의원실 선임 비서관)

일각에서는 비상계엄을 거치며 '보수 정당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에 군대를 투입시킨 전 대통령의 오판과, 이를 따르는 일부 친윤 지지층의 극단적 언어와 행동, 방관·묵인한 국민의힘 지도부의 소극적 대응이 보수의 핵심 가치인 '절제와 법치'에 금을 냈다는 지적이다. 국민의힘이 '시민의 정당'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한 보수 재건은 요원하다는 경고가 당 안팎에서 동시에 나온다.
"지금도 '내란 종식'을 외쳐야 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치의 본령 대신 정치적 유불리 계산만 남은 것 같다. 상대(야당)가 링 안에 들어오지 않는데 우리만 링 위에서 국정 안정과 민생 회복, 코스피 5000 등을 외칠 수는 없다. 12·3 비상계엄에 대한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상식적 정치 경쟁이 가능하다."(2025년 11월26일, 박지혜 민주당 의원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보수가 가진 자유민주주의적 특성은 절제·제한된 정부인데 윤석열 정권은 이를 뛰어넘은 폭력 정권이었다. 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소수는 폭력도 보수의 전통이라는 식이다. 보수가 시민의 정당으로 거듭나지 못한 증거다. 이런 보수가 집결하는 만큼 시민의 보수가 새로 태어나는 것은 방해가 된다. 죽을 땐 명예롭게 깨끗하게 죽어야 한다."(2024년 5월19일,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
전문가들은 국민의힘의 퇴행이 민주당에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건강한 보수가 존재해야 진보가 바로서고, 서로가 서로의 대안이 될 때 정치의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결국 보수의 위기란 한국 정치 전체의 위기라는 얘기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연구소장은 "당원들에 의존하는 민주당의 기호지세(騎虎之勢·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세)는 '이렇게 해도 저 쪽(국민의힘)은 이긴다'는 정치 셈법의 결과"라며 "두 정당 모두 '괴물'로 변해가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민의힘은 '반명'을 말하고 있지만 국민은 '너희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라며 "보수가 신뢰를 회복하려면 갈등을 유발하는 게 아닌 승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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