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부터 2500년에 걸친 사회주의 역사 정리했죠”

‘사회주의 정치사상사’.
박호성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가 교수 부임 첫해인 1987년 맡은 첫 강의 제목이다. 독일 서베를린 대학(현 베를린 자유대)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 강좌에서 주로 마르크시즘을 다뤘다. 한국 대학 최초로 마르크시즘을 본격적으로 다룬 강의는 당시 언론 보도를 탈 정도로 화제였다.
“대형강의실이 몰려든 학생들로 가득 찼지요. ‘거동 수상자’들이 들락거리는 것 같다는 조교 말에 강의를 늘 ‘학생 아닌 사람은 나가달라’는 말로 시작했어요.” 지난달 24일 인천 강화군 자택에서 만난 박 교수 말이다.
사회주의와 민족 문제의 관계를 독일 사례로 분석한 그의 박사 논문(‘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은 학위 취득과 동시에 독일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독일 학계의 이런 대접은 한국에 특별한 학연이 없던 그가 바로 대학에 자리 잡게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고 홍세화, 판소리명창 임진택 등과 서울대 외교학과 동기인 그는 학부를 졸업하고 달동네 난곡에서 화원을 운영하다 “서울대 관악캠퍼스로 등교하는 학생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돌연 공부에 뜻을 품고” 학비가 없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서베를린대에서 학부부터 시작해 석·박사까지 마쳤다.
대학교수가 된 뒤 강단 밖 활동도 활발했다. 1991년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월간 사회평론’을 만들어 편집인을 맡았고 고 박원순, 조희연 등과 함께 시민단체 참여연대를 1994년에 만들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연구소장도 지냈다.
2014년 정년 직후부터 강화도에서 홀로 사는 그는 최근 ‘사회주의 사상사’(사회평론아카데미)를 펴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부터 소련·동유럽 공산주의 몰락까지 지난 2500년 동안 인류 역사에 나타난 사회주의 사상을 살핀 학술서다.

그는 이번 책을 쓰기 위해 제자들 도움을 얻어 서강대 도서관의 최신 사회주의 관련 자료를 구해 봤고 현직 때 공부한 플라톤 대화편 독일어와 영어판 텍스트도 다시 대조하며 면밀히 살폈단다.
책은 국가를 이끄는 수호자 계급을 대상으로 재산은 물론 ‘처·자식 공유제’까지 설파한 ‘극단적인 공산주의 사상가’ 플라톤의 정치사상에서 시작해 흔히 공상적으로도 불린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와 생시몽, 로버트 오언 등의 이념을 짚은 뒤 “사회주의의 서유럽판”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러시아판” 스탈린주의를 분석하고 이어 소련 및 공산권 붕괴까지 다뤘다.
그는 책 서문에서 현재 지구 사회가 직면한 인간과 자연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 그리고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를 획일화하면서 민주주의 생존 가능성까지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위기감 등이 책 집필로 이끌었다고 했다.
왜 썼냐는 질문에 이런 말도 했다. “소련 동구 공산권이 건재할 때는 자본주의와 공산권의 적대 관계로 사회주의에 대한 객관적·합리적 고찰이 거의 불가능했어요. 하지만 동구 공산권 몰락으로 지금은 균형 잡히고 객관적인 고찰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생각했죠. 개인적으로는 저의 학자 생활을 정리해 볼 필요도 있다고 봤죠. 사회주의 사상은 제가 학생들과 대학 강단에서 접촉한 첫 매개체이기도 했고요.”
그는 이번 책은 대학 강의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학부 수업은 주로 마르크시즘이었어요. 이 강의를 대학원에서도 하면서 사상의 폭을 다소 넓혔습니다만 책에선 플라톤과 사회민주주의 및 동구 공산권 몰락까지 심화·확장했어요. 2500여년에 걸친 일종의 사회주의 통사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사회주의란 뭘까?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체제를 지향하는 이념”이라며 덧붙였다. “그러면 인간답게 사는 게 뭔지 물어야 하는데요. 그건 인간 사이의 차별이 극복된 상태라 할 수 있죠. 나는 매일 빵 한 조각 먹기도 힘든데, 저 사람은 왜 매일 불고기만 먹느냐, 바로 이런 차별이 극복되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거죠.”
하지만 현실은 그가 책에 썼듯 “‘자유경쟁’의 원리가 성경 말씀처럼 군림”하면서 “‘악마적 불평등’이란 말이 결국 시대의 보편개념으로 정착해버릴 정도가 되었다.” 그 탓에 “특권을 독점한 이들은 자유경쟁의 멋들어진 허울에서 희희낙락하는 동안 낙오자는 패배의식과 자괴감에 빠져들며 위장된 공정성 속에서 마취환자처럼 숨 가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책에서 20세기는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각축 속에 닻을 들어올렸지만 세기말에 마르크스적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에 판정패하면서 지금은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상호 각축하는 현실이라고 썼다. 하지만 한국만 봐도 ‘노동자 중심성’과 ‘평등’을 내세우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제도권 정당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발명한 서유럽에서도 사회민주주의는 스웨덴과 독일 등을 예외로 하고 대부분 나라에서 강력한 현실 정치적 힘을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짚었다.
1987년 한국 대학 첫 ‘마르크시즘’ 강좌
책은 플라톤·사회민주주의까지 다뤄
“인류사는 시장에서 광장으로 발전
광장의 대표적 이념이 사회주의”
“지금은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각축
자유민주주의에서 평등 추구도 의미”
2014년 퇴임 뒤 강화에서 연구·집필
그는 스스로 ‘역사적 낙관론자’라고 했다. 인류의 역사는 길게 보면 ‘평등의 확장사’이자, ‘시장’에서 ‘광장’으로의 발전사라고 할 수도 있단다. “시장이 사익을 위해 흥정하는 곳이라면, 광장은 공익을 위해 절규하는 곳이죠. 이를테면 범속하고 혼잡한 이기주의가 활개 치는 공간이 시장이라면, 정의의 함성을 내지르며 서로 뜨거운 연대의 손을 맞잡고 분투하는 곳이 광장이죠.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야말로 광장의 이념입니다. 시장에 저항하며 광장을 지향해 온 가장 장렬한 역사적 투혼의 하나가 바로 사회주의라는 말이죠. 이러한 광장 이데올로기의 가장 뛰어난 발현이 주권재민의 원리입니다.”
때문에 그는 ‘역사의 미로’처럼 보이는 지금 상황을 두고 “너무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역사발전은 결코 단선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간직해요. 밝음과 어둠이 서로 교차하면서 역사의 날줄과 씨줄이 짜이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어제의 어둠이 오늘의 빛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밝음이 내일의 어둠으로 변할 수 있어요. 그리하여 ‘혁명’(revolution)과 ‘진화’(evolution)와 ‘퇴행’(involution)을 되풀이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죠. 이런 뜻에서 어느 시기의 역사적 비극에 너무 좌절할 필요도, 역사적 진화에 너무 환희할 필요도 없어요.”
왜 플라톤을 사회주의의 뿌리로 주목했는지 궁금해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플라톤은 계급적 불평등을 인정했어요. 이를 두고 플라톤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2500년 전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플라톤은 요새 말로 프롤레타리아(생산자 계급)에게는 관심이 없었어요. 대신, 쉽게 말해 총칼을 가진 수호자 계급에 한해서는 공산 체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처자식 공유제’까지 말했으니 마르크스보다 더 급진적이었죠. 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이 폭력적 수단을 독점하고 있어 더 많이 갖고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현실화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세력으로 파악했죠. 따라서 국가적 정의를 위해 이 집단을 통제할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그가 책에서 다룬 여러 사회주의 사상가들 중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적실하게 다가오는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는 19세기 전반기 영국의 개혁운동가이자 사회이론가인 로버트 오언을 꼽았다. “저는 오언 정도면 수용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마르크시즘으로 가는 건널목에 있는 사람인데요. 혁명적인 노선을 추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평화적으로 도래할 사회주의 사회의 미래에 대한 꿈과 확신을 지녔던 인물입니다. 자본주의적 모순이 격화할 무렵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화 노력에 매진하기 위해 사회적 불의와 맞서 끝없이 투쟁했죠. 노동자 자조정신에 불을 지펴 협동조합의 아버지로 불렸고 또한 놀랍게도 그 시대에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었어요. 오언은 인간의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신봉하여 교육이 그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 사람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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