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달빛처럼 아침은 이슬처럼 대낮은 가을바람처럼 [지리산 노고단~피아골]

신용석 기획위원 2025. 12. 2.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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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리산국립공원 소장의 ‘지리산 무박 산행기’
노고단에서 바라본 지리산 아침. 가운데 멀리 천왕봉과 중봉이 살짝 뾰족하고, 왼쪽의 반야봉은 펑퍼짐하다. 산이 누운 듯, 황소가 누운 듯, 어머니 품처럼 지리산은 편안하고 아늑하다. 사람들은 아이처럼, 험한 노동을 마친 일꾼처럼 그 품에 들어가 위로를 받는다.

불현듯 산이 부른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도에서 산을 뒤적거리다가 손가락은 자꾸 멀리 나간다. 지리산에서 멈춘다. 그래! 심야버스로 가서, 밤기차로 올라오자! 서울에서 지리산을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교통편은 동서울터미널에서 심야버스를 타는 것이다. 노고단을 가려면 23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새벽 3시에 성삼재에 내려, 1시간쯤 걸어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한다. 노고단 정상은 새벽 5시부터 개방된다.

주말의 심야버스 앱을 검색했으나 열흘 전까지 만석이었다. 취소되는 표가 있을까 매일 밤 앱에 들어간 끝에 간신히 좌석 하나를 구했다. 국립공원 예약시스템에 들어가 노고단 정상 탐방예약을 했다. 노고단 정상은 생태계 보호를 위해 하루 입장객을 약 1,900명으로 제한하는 예약제를 하고 있다.

새벽 산행.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칠흑 같은 밤이지만 숲을 벗어나자 깜깜한 밤하늘에 별이 쏟아져 내린다. 멀리 노고단의 중계탑 불빛도 반짝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동서울터미널 성삼재행 버스 게이트에 모인 사람들을 보니 등산 초보자는 거의 없다. 2인조 또는 3인조가 절반이고, 나홀로 등산객이 절반이다. 심야의 서울을 총알택시처럼 빠져나간 버스가 거침없이 고속도로를 가른다. 함양, 인월을 거쳐 뱀사골을 통과하자, 급커브에서 몸이 이리저리 쏠리고, 급경사에서 차체가 부르르 떤다. 그 바람에 자동적으로 잠이 깨고, 버스는 정확히 새벽 3시 성삼재에 도착했다.

새벽 3시의 성삼재는 달나라

컴컴한 주차장에 내리니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우주선에서 달 표면에 내린 느낌이다. 평소에는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지만, 오늘의 성삼재는 바람이 잔잔하다. 주변은 고요해서 더욱 달나라 분위기다. 달나라에는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이 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일단 편의점 옆 휴게공간으로 들어가 장비를 체크하면서 간식을 먹는다.

노고단대피소. 현대식으로 다시 지어 세계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수용인원을 줄이고 개인 공간을 늘렸다. '코 고는 소리'에 대한 민원이 대폭 줄었다. 사진 지리산국립공원 전남사무소

무인 편의점에는 핫팩, 토시, 기능성 속옷 같은 등산 소품들이 갖춰져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컵라면이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해발 1,100m 고지의 깜깜한 새벽에 필수적으로 먹어줘야 하는 '소울 푸드'다.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에서처럼.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까지는 빠르면 40분, 늦어도 1시간 거리의 산책로다. 노약자도 휠체어도 쉬엄쉬엄 오르는 평탄한 길이다. 이 시간의 새벽길은 깊은 동굴에 들어가는 듯 칠흑같이 깜깜하다. 랜턴을 끄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숲길을 벗어나 하늘이 열려 고개를 드니, 검은 하늘에 수많은 별빛이 보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거린다.

노고단 전경. 노고단은 해발 1,50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30만 평이 넘는 평평한 고원지대다, 알프스 초원 같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털진달래, 원추리, 복주머니란, 물매화 등 희귀식물이 계절마다 교대하며 생생하게 자란다.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수의 별이 수천억 개이고, 우주에는 그런 은하수가 수십억 개 있다고 하니, 그중 하나의 별에서 이곳에 서 있는 내 존재감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미미한 존재가 고요한 우주에서 뚜벅뚜벅 걷는데 발자국 소리가 너무 크다. 숲속의 큰 동물을 깨우는 거 아닌가,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니 겁이 난다.

깊은 가을의 차가운 날씨지만, 대피소에 도착할 즈음에는 등에 땀이 밴다. 새로 지은 노고단대피소는 호텔급이다. 수용인원을 줄이고 개인 공간을 크게 늘려 캡슐 형태의 독방 36개가 제공된다. 사전 예약이 필수다. 기다란 침상에서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누워 칼잠을 자던 시대는 지나갔다. 코 고는 사람을 원망하며 잠을 설치던 시대도 지나갔다.

노고단 정상의 아침 풍경. 돌탑 앞에서 1번 인증사진을, 운해를 배경으로 2번 인증사진을, 지리산 능선을 배경으로 3번 인증사진을 찍은 후 '운雲멍'을 때린다.

대피소 취사장은 만원이다. 슉슉하는 버너 소리, 칙칙하는 김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냄새도 만원이다. 고기 볶는 냄새, 김치찌개 냄새, 라면 냄새가 진동한다. 갖가지 냄새가 섞이고 합성되어 새로운 냄새가 탄생한다. 침이 고인다.

노고단 정상은 새벽 5시부터 개방이지만, 일출 시간은 오전 7시 언저리다.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일찍 떠나고,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은 오전 6시 넘어서 움직인다. 예약할 때 받은 큐알 코드를 노고단 게이트에서 찍고 올라간다.

천국의 계단 올라, 구름 위 꽃밭

정상으로 난 목재 데크를 사뿐사뿐 밟으며 올라선 중간 지점에서 '둥그런 언덕 위에 젖꼭지처럼 찍힌 돌탑'을 바라본다. 산평선山平線 아래는 이슬로 샤워를 마친 깨끗한 초원이 초록에서 갈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산평선 위의 동쪽에는 잿빛 구름 사이로 붉은 여명이 빛을 내고, 서쪽에는 시퍼런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대낮처럼 떠있다.

삵 배설물. 피아골로 내려서는 길에서 보물을 만났다. 금방 누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반짝반짝하는 삵의 배설물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어디선가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살아줘서 고마워!' 사진 김의경

새벽과 아침과 대낮이 동시에 그려진 우주에서, 돌탑 꼭지점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며 팝송 제목을 떠올린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stairway to heaven'이다. "희망을 찾아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샀는데, 정말 그곳에는 천국이 있을까? 새로운 날들이, 내가 소망했던 게 있을까…" 이런 내용이다. 우리가 산을 찾는 이유와 같다.

지리산에 와서, 누구나 멋진 일출을 기대한다. 내가 가장 아름답게 본 일출은 맑은 날이 아니다. 찌푸린 회색빛 하늘에 검은 구름이 마구 흘러가고 흘러와서 '도저히' 일출을 기대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검은 구름의 뒷면을 주홍빛,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애간장을 태우다가, 갑자기 먹구름의 빈틈을 열고 새빨간 불덩어리가 짠~하고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며 검은 하늘, 검은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깜짝 일출'이 가장 멋지고 장엄하다.

노고단 운해. 아침 노고단에서 섬진강과 구례평야를 뒤덮은 구름바다를 내려다본다. 하얀 솜이불처럼 세상을 따뜻하게 덮을 때도 있고, 커다란 파도처럼 산자락을 거칠게 넘실거릴 때도 있다.

오늘처럼 너무 맑은 날에는, 해가 뜨기도 전에 온 세상이 너무 밝다. 해가 뜨더라도 은은하기만 하다. 서쪽으로 몸을 돌려 섬진강 운해를 내려다본다. 너른 구례평야와 기다란 강줄기에 솜뭉치 이불이 가득하다. 그 아래 사람과 나무들, 물고기들은 솜이불 밑에서 늦잠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바깥에 나가면 아침 안개가 자욱할 것이다.

해발 1,507m의 노고단老姑壇은 늙은 할머니, 즉 지리산 여신에게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민초들이 엎드려 생로병사의 아픔과 애환을 달래던 곳이다. 그런 역사적 의미와 함께, 부드러운 고원에 펼쳐진 독특한 풍경과 희귀한 생태계가 아름다워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명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크게 훼손되고, 이후 무분별한 벌목과 군사시설이 들어서는 등 본래의 자연이 크게 망가졌던 곳이다.

노고단 훼손지 복원. 천 년의 흙과 식물이 다 쓸려나간 황폐지에 기름진 토양과 씨앗을 뿌리고, 주변의 식물을 옮겨 심고, 외래종을 제거하면서 10년 이상 사람 출입을 금지했다. 그 결과 아름다운 자연을 회복해 '구름 위의 꽃밭'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 상처마다 흙을 덮고, 거름과 씨앗을 뿌리고, 붕대(짚)로 감는 등 '큰 수술' 끝에, 이제는 '구름 위의 꽃밭'으로 부를 만큼 생태복원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런 과정을 잘 아는 나는, 목책 바깥으로 나가 '간신히 복원된 풀'을 밟아대는 사람들에게 "어서 나오세요!"라고 잔소리를 하느라 하산 시간이 늦다.

위로받거나, 도전 결의 다지거나

천왕봉까지 25.5km의 종주길이 시작되는 노고단 고개 게이트를 통과하면 '아, 이제 지리산에 들어왔구나!'라고 느끼는 숲길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걸었던 잘 정리된 길이 아니라 돌과 나무뿌리들이 얽히고설킨, 생긴 그대로의 산길이다. 사람 소리보다는 숲 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가 가득한 자연의 길이다.

돼지령을 지나 전망 좋은 언덕에서 정인지(68)라는 분을 만났다. "지리산은 어떤 산인가요?"라고 물으니, "힐링의 산이죠, 언제나 위로를 받아요, 알프스 3대 봉우리, 우리나라 100대 명산 다 가보았는데, 지리산만큼 편안한 곳이 없어요"라고 답한다. 며칠 후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리산은 황소 같은 산입니다. 사람들 요구를 다 들어주고, 남 탓을 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우리 민족의 근성을 닮았습니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화대종주(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46km)를 하는 이하늘, 조유빈 서른 살 동갑내기 청년을 만났다. 그들에게 지리산은 '도전해서 결의를 다지는' 산이다. '강한 도전! Seek Stronger Challenge'을 이니셜로 하는 'SSC 패션 브랜드'를 창업한 지 한 달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업 성공과 꿈 쟁취를 위해 종주를 하고 있다. 그 꿈이 무어냐고 물으니 의외로 '행복한 결혼과 화목한 가정'을 일구는 것이라고 답한다. 요즘 청년들의 꿈은 현실적이다.

피아골대피소와 김종복 대장. 그는 대피소 임대료가 너무 비싸니, 자기가 하고 있는 청소, 구조 등의 봉사료를 계산에 넣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언젠가 깜깜한 밤중에 비를 쫄딱 맞고 피아골대피소로 들어갔을 때, 그가 10년쯤 된 묵은지 한 덩어리를 꺼내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여준, 그 김치찌개 맛을 나는 잊지 못한다.

피아골로 내려선다. 계곡을 만날 때까지 약 1km의 이 길은 악마의 길이다. 워낙 경사가 급하고 계단이 높아 올라설 때는 물론, 내려설 때도 금방 온몸이 땀에 젖는다. 예전에 무릎에 닿았던 산죽이 이제 얼굴을 스칠 만큼 우거졌다. 산죽은 무성하게 자라서 숲 안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모자를 벗고 산죽을 털면 이슬방울들이 머리에 떨어진다. 이슬 샤워다.

피아골은 지리산에서 단풍이 가장 화려하게 드는 곳이다. 단풍나무도 많지만, 피아골이라는 이름 자체가 피血를 연상하게 해서 '빨간' 뉘앙스를 갖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과 빨치산 전투 때 피아골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피아골대피소를 지으려고 터파기를 할 때 많은 인골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피아골이라는 단어에서 '피'는 이곳에서 많이 났던 곡식의 이름이다.

어쨌든 단풍 절정기이어야 할 피아골에 빨간 단풍은 거의 없다. 노란색, 갈색으로 말라비틀어지는 잎이 많다. 올라오던 탐방객이 "매년 10월 말에 피아골에 오는데, 올해처럼 단풍이 없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탄식했다.

길고 더웠던 여름, 전에 없이 잦았던 가을비로 나무들의 '신체리듬'이 깨졌다. 그래서 빨간 색소를 만드는 생리 작용에 탈이 생긴 모양이다. 이 현상은 전 세계적이다. <타임TIME>지 최근호에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너무 건조해도 잎들이 바삭바삭 말라crisp off, 빨리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기사가 실렸다. '단풍 관광객'을 불러 모아야 하는 지역경제에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반달가슴곰. 오른쪽은 곰의 발신기를 교체하면서 건강 체크를 하는 모습. 반달가슴곰은 전국의 산에 많이 살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대량 포획과 이후 밀렵으로 지리산에만 겨우 5개체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대로 두면 멸종되기 때문에 러시아, 중국에서 새끼곰을 도입해 복원한 결과, 현재는 약 100개체로 늘었다. 그러나 주변에 주민들이 살고, 탐방객들도 많아 '사람과 곰의 공존'을 위해서는 더욱 과학적인 관리와 사람의 배려가 필요하다. 사진 국립공원 야생생물보전원

우리나라 마지막 산 대장

피아골대피소에서 지리산 산악구조대 김종복(67) 대장을 만났다. 그는 뱀사골, 노고단, 피아골 등 지리산 대피소에서만 50년 가까이 생활한 '레전드'다. 소년 때 노고단산장에 들어가 지리산 호랑이로 불렸던 고 함태식 선생을 '아버님'으로 모시고 산꾼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마지막 산 대장'이다.

피아골대피소에서 아래의 직전마을까지는 4km, 1시간 30분쯤 걸린다. 가을에는 산도 붉고, 산이 비친 물도 붉고, 사람도 붉은 삼홍三紅을 즐기며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단풍 숲을 보지 못하고, 다만 네 그루의 단풍나무만 보았다.

길을 내려서며 예전에 피아골대피소에 자주 나타났던 반달가슴곰을 포획하러 국립공원 직원들이 커다란 포획틀을 등에 메고 오르내리던 기억이 났다. 발신기 없이 사라진 곰을 찾으러 온 지리산을 뒤지고 다니며 나의 생명이 위태로웠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많다.

구례 여행 이모저모. 음식이 아니라 '맛있는 약'을 먹는 기분이었던 다슬기수제비와 다슬기무침. 구례구역 건너편에 있는 레스토랑 '구례역대합실'과 '구례역 제과점'은 지역의 식재료를 사용한 메뉴를 개발해 여행자들이 꼭 들르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여기서 5분 거리에 청계천 헌책방을 100개쯤 옮겨놓은 듯한 '섬진강책사랑방'이 있다.

목숨 걸고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이 "산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갔다"고 답한 것처럼, "지리산에 본래 곰이 있었기 때문에 복원한다"는 말이 정답이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지리산의 생태계를 되살리고, 민족신화에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나오는 곰을 살려내기 위해서다." 지인들이 묻는다.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해요? 사람을 공격하나요?"

지난 3년간 지리산 탐방객은 약 1,100만 명이고, 곰이 탐방객 앞에 나타난 사건은 6번이었다. 따라서 탐방객이 곰을 만날 확률은 0.00005%다. 6번 모두 곰이 사람 신체를 접촉한 적은 없다. 갑자기 사람과 곰이 만나면, 혼비백산 도망치는 것은 곰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곰은 사람 냄새와 인기척을 피해 깊은 산에 꼭꼭 숨어 산다. 그러나 호기심이 왕성한 일부 개체가 음식 냄새를 맡고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곰은 마취총으로 포획해 깊은 숲으로 재방사하거나, 사고를 반복하는 개체는 포획 후 교육용과 번식용으로 활용한다.

어쨌든 반달가슴곰을 만날 확률은 '없지 않으므로' 지리산에서는 음식물을 비닐팩에 꼭꼭 싸매서 다니고, 배낭에 곰이 싫어하는 딸랑딸랑 소리를 내는 방울을 매달고,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다니는 안전한 산행을 권한다.

정해진 등산로로만 다니면 곰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만에 하나 곰을 만나면, 곰의 시선을 피하지 말고 슬슬 뒷걸음으로 곰과 간격을 벌리며 물러나야 한다. 자신의 덩치를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 양손과 스틱을 천천히 흔드는 것도 방법이다.

피아골을 빠져나와 섬진강을 지난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침략했을 때 두꺼비(섬蟾)가 한꺼번에 울어 왜구가 놀라서 물러났다는 나루터(진津)가 강 이름이 되었다. 섬진강은 댐과 보가 없는 자연의 강이다. 상류에서 내려온 은빛 금빛 모래섬과 십리 벚꽃길에 풍경의 정취가 넘친다.

이곳에서 만나는 재첩국과 다슬기수제비, 민물매운탕은 맛도 영양도 만점이다. 구례에 다다라 강 건너 산기슭을 올라 사성암에 들른다. 중국 무협지에 나올 듯한 절벽 끝 절집에서 내려다보는 구례평야와 섬진강 굽이, 지리산 원경은 '커다란 동양화'다.

구례 기차역은 순천 땅이다. 그래서 '구례 입구'라는 뜻의 구례구역이다. 기차 등받이를 뒤로 누이고 눈을 감는다. 새벽부터 번갯불처럼 지나온 지리산이 아른거린다. 새벽은 달처럼 고요했고, 아침은 이슬처럼 청량했으며, 대낮엔 가을바람이 물결처럼 일었다. 저녁의 지리산은 황소가 길게 누워서 쉬는 자세다. '지이산智異山'이라고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 그곳에 다녀오면 지혜가 달라진다는 명산을 다녀왔다. 달라진 몸과 가슴을 느낀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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