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떠나는 이스라엘 고소득 전문직... 전쟁·정치 불안에 2년 새 12만명 순유출

유진우 기자 2025. 12. 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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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불안·정치 환멸·살인적 물가
3중고에 기술 인력 유출 가속
포르투갈 시민권, 새 ‘안전 자산’ 부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던 이스라엘을 등지는 유대인 행렬이 멈추지 않고 있다. 2년 동안 이어진 하마스와 전쟁, 살인적인 물가와 높은 세금, 극우 정권 폭주에 지친 고학력 전문직들은 줄줄이 탈(脫)이스라엘에 나섰다.

29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중심가에 위치한 포르투갈 대사관에 길게 줄을 선 이스라엘인들. /페이스북

30일(현지시각) 이스라엘 현지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TOI)은 전날 새벽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 중심가에 위치한 포르투갈 대사관 앞에 새벽 4시부터 3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전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거리에 낚시 의자를 펴고 담요를 덮어쓴 채 밤을 지샌 이들은 피곤함보다 어떤 절박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이들은 제3세계 난민 신청자가 아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소위 고소득층으로 꼽히는 의사, 변호사, IT 개발자 같은 전문직 근로자들이 대다수였다. 모두 포르투갈 시민권을 얻거나 여권을 갱신하려 이 자리에 몰려 들었다. 포르투갈 대사관이 온라인 예약 시스템 마비를 이유로, 이날 하루 오프라인 선착순 접수(Walk-in)를 받겠다고 공지하자 벌어진 기현상이다.

이스라엘 반정부 시위대가 2023년 11월 텔아비브 하비마 광장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이민흡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2년부터 올해 8월까지 이스라엘을 떠나 돌아오지 않은 순이민자(출국자 수에서 귀국자 수를 뺀 수치)는 약 12만 5000명에 달한다. 이는 이스라엘 건국 역사상 단기간 내 발생한 최대 규모 인력 유출이다.

특히 하마스와 전쟁이 발발한 2023년에만 8만 2800명이 짐을 쌌다. 이후 2024년 8월까지 5만 명이 추가로 이스라엘을 떠났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로 돌아온 인구는 나간 인구 대비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극우 연정에 대한 반감도 탈출로 이어졌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전문가를 인용해 “이스라엘 엘리트 층의 조용한 출국(silent departure)이 잦아지고 있다”고 했다. 시위를 하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조용히 짐을 싸서 나라를 떠나는 방식으로 정부에 불신임을 표하고 있다는 의미다.

세르지오 델라퍼골라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는 최근 유대인 정책 연구소(JPR) 기고문에서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인구 유입이 유출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였지만, 2023부터 2024년 사이 매우 이례적으로 이민 수지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며 “1980년대 경제 위기 이후 처음 겪는 현상으로,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닌 안보와 정치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2022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러시아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유대인 이민자들이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인재 유출은 이스라엘 경제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이스라엘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대표적인 소국(小國)이다. 인적 자원, 특히 IT 기술력이 핵심 국가 경쟁력이다. 전체 수출액 가운데 53%가 첨단산업에서 나오고, 이 분야 종사자는 전체 근로자 중 11%에 그치지만 전체 소득세 3분의 1을 부담한다.

이스라엘 혁신청(Israel Innovation Authority)이 발간한 ‘2025 첨단산업 고용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10월 하마스와 전쟁이 발발한 후 지난해 7월까지 1년 동안 해외로 이주한 이 분야 종사자는 8300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첨단산업 인력 가운데 2.1%가 채 1년도 안 돼 나라를 떠났다.

혁신청 보고서는 “해외 이주가 늘면서 이스라엘 내 스타트업 창업이 급감하고, R&D(연구개발) 센터가 해외로 이전하는 등 산업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실제 지난해 이스라엘 하이테크 종사자 수는 10년 만에 감소세(-1.2%)로 돌아섰다. 단 벤-데이비드 쇼레시 연구소 소장은 타임스오브이스라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 경제 엔진인 혁신 분야는 전체 인구 중 극소수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다”며 “우리는 지금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두뇌’를 잃고 있다. 이들 중 수만 명이 빠져나가면 국가 경제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했다.

2020년 11월 이스라엘 텔아비브 증권거래소 앞 전자 게시판을 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스라엘에서 유독 인기가 많은 이민 국가는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2015년 ‘세파르디(sephardic·스페인과 포르투갈계 유대인) 귀환법’을 제정해 16세기 종교재판 당시 추방당한 유대인 후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다.

초기에는 역사적 권리 회복 차원에서 이 제도를 활용하는 유대인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생존을 위한 비상구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포르투갈 국적을 얻는 성격이 짙다. 포르투갈 시민권을 취득하면 유럽연합(EU) 회원국 어디서나 거주하고 일할 수 있다. 솅겐 조약에 따라 자유로운 이동도 보장된다. 자녀들은 유럽 대학에서 저렴한 학비로 공부할 수 있다. 징병제 국가인 이스라엘을 떠나 아이들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부모 수요가 유독 폭발적이다.

경제적 유인도 크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는 2021년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선정한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 1위다. 반면 포르투갈은 수도 리스본 생활비도 텔아비브 대비 절반 수준에 그친다. 중동 매체 미들이스트모니터(MEMO)는 “이스라엘인들은 포르투갈 시민권으로 EU 내 자유로운 이동, 낮은 생활비, 유럽 대학 진학 기회 등을 노린다”며 “특히 2023년 10월 이후 안보 위협이 가중되면서 두번째 여권을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고 전했다.

지난달 15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하비마 광장 옆 찰스 브론프만 강당 앞에 모인 이스라엘 시민들. /연합뉴스

포르투갈 정부는 최근 자국 국적을 따려는 이스라엘인들이 부쩍 늘자, 세파르디 시민권 부여 요건을 강화했다. 앞으로 이 제도로 포르투갈 국적을 얻으려면 3년 이상 현지에서 거주해야만 한다. 29일 새벽부터 이스라엘인들이 대사관 앞에 길게 줄을 선 이유는 이민 문턱이 더 높아지기 전에 어떻게든 국적을 취득하려는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이날 한 40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TOI 인터뷰에서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보다, 전쟁이 끝나도 이 나라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이 더 무섭다”며 “내 아이들에게 군복 대신 유럽 여권을 쥐여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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