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120년 만의 기회, ‘원자력 잠수함’이 바꿀 국가의 운명

박인국 前 주유엔대사, 최종현학술원 초대원장 2025. 11. 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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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의 치욕과 달리
한국 반도체와 조선업은
동북아 안보의 핵심 가치
북핵에 맞설 원잠 건조와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운명을 건 생존 전략
1905년 9월 대한제국을 찾은 엘리스 루즈벨트 일행. 엘리스는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이다. 왼쪽부터 고든 패덕 주한미국 대리공사, 엘리스 루즈벨트, 약혼자 닉 롱워스. 촬영장소는 미국공사관(현 미 대사관저)이다. 조선인은 엘리스를 '세계 최고국의 공주'라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고, 고종은 대한제국을 일본으로부터 구원해줄 사람으로 여겼다. /코넬대학교 희귀문서 컬렉션

1905년 7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선박 외교 사절단(단장 태프트 전쟁장관)을 3개월에 걸쳐 일본과 필리핀으로 보냈다. 이 사절단에 포함된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녀 엘리스는 9월 19일 고종을 예방했다. 고종은 풍전등화 조선을 살릴 실낱 같은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태프트 장관은 이미 두 달 전 도쿄에서 가쓰라 일본 총리와 조선과 필리핀의 식민 지배를 상호 양해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후였다. 미국은 군함과 상선에 연료와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일본과 필리핀을 주목했고, 그해 11월 미국 공사관을 철수시킨다. 고종이 이승만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밀서를 보냈지만 묵살된 것과 때를 같이한다. 우리가 지정학적 중요도나 해양 기지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쓰라린 역사의 단면이다.

정확히 120년 후인 지난 10월 경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어떻게 평가됐을까? 우리 ‘말발’이 먹혀들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3500억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재정 투자는 제쳐두고, 한국은 반도체와 조선 산업이라는 ‘21세기의 식량과 연료’를 꽃피우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부상했다. 만난(萬難)을 딛고 이룩한 한국 기업과 산업의 기적 같은 반전은 첨단 과학기술과 산업이 동북아 안보 플랫폼에서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뜻깊은 신호다. 이런 관점에서 경주 정상회담 ‘팩트시트’ 발표 이후 필수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하 원잠) 건조와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 문제는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모두 관철해야 할 생존 전략이다. 원잠은 고도화된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할 안보의 핵심 역량이고, 원자력 협정 개정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원전 산업의 미래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은 1988년 일본에 허용한 20% 미만의 우라늄 농축을 한국에도 전면 허용할 때가 됐다.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원자로 26기를 가동하고 있는 세계 5대 원전 보유국 한국이 원전 연료인 농축우라늄을 자체 공급할 길이 원천 봉쇄돼, 세계 농축우라늄 공급 위기 시 발생할 엄청난 국가적 위험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 세계 농축우라늄 공급의 40% 이상을 과점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의존이 심화될 수도 있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의 레임덕이 시작되기 전인 향후 1년 안에 양국 간에 상당한 수준의 법적 문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이나 원잠 도입 같은 민감한 사안은 트럼프 대통령의 밀어붙이기 방법이 아니면 미 행정부와 의회에 뿌리 깊은 ‘핵 비확산 지상주의’의 벽을 넘어서기 어렵다. 내년 11월 중간선거까지 트럼프 대통령을 어떻게든 움직여 우리의 뜻을 관철하는 것은 우리 대통령과 정부의 막중한 책무다.

우리 측 통상협상 대표단은 팩트시트를 공식 문서화 할 경우 통상문제 등에서 향후 우리 입장을 개선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될 수 있다고 했으나, 원자력 협정 개정은 문서 합의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모처럼 온 기회가 공염불이 될 수 있다. 미일 원자력 협정은, 1977년 카터 행정부 출범 후 일본 원자력 산업이 재앙적 상황에 직면했으나,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취임 후 나카소네 총리와 맺은 특별한 친분 등을 활용해 1988년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의 건별 승인이 아닌 포괄적 동의를 받아내는 미일 원자력 협정 개정으로 이어졌다.

셋째, 원잠 건조 장소와 핵연료의 종류 결정에는 열린 자세로 임해야 한다. 팩트시트는 한국 측이 원하는 20% 미만의 농축우라늄을 사용할 것인지, 미국이 사용하는 90% 이상의 고농축우라늄을 완전 봉인해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건조 장소가 한국인지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인지도 한미 간에 엇박자를 내고 있다. 양측 안 모두 장단점이 있고 우리 국내 산업 육성을 당연히 고려해야겠지만,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 유지라는 대의 앞에서 너무 우리 주장만 고집해 소탐대실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좁은 한반도 해역 내 원잠의 추적 기능과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미시적 관점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북한 핵무기 고도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특별한 기술 제휴를 통해 북한이 전략핵잠수함 건조에 박차를 가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에 대응할 원잠 보유는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캐나다의 경우 30년 이상 노후화된 영국제 디젤잠수함을 교체해야 할 시기에 있고 생존위협이 되는 주적이 눈앞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호주의 경우에는 수십 년이 걸릴 원잠 도입 결정만으로도 벌써 국가안보 신인도가 상승하고 있는 등 국가별로 상황이 다양해 원잠의 효용성을 획일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미 해군 원자력 추진 잠수함 오클라호마시티호(SSN 723.Oklahoma City)./미 해군

냉전 시절 소련의 전략핵잠수함이 군집한 오호츠크해의 캄차카반도 해군 기지를 미 해군 핵잠수함이 첨단 대잠수함 기술과 작전술로 효과적으로 차단한 경험(Hunter-Killer Operation)은, 북한 전략핵잠수함 봉쇄와 억제는 물론이고 동북아 해양질서와 평화유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난 30여 년간 맥없이 끌려온 북핵 문제를 해결할 의외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120년 전 치욕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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