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실크로드 기행, 시안(長安)에서 둔황까지

유경숙 소설가 2025. 11. 3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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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가는 길
▲ 유경숙 소설가
추색이 깊어질 때, 나는 또 짐을 꾸렸다. 이번 답사길은 천년 고도 시안(西安 Xian)에서 둔황 막고굴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다. 서역으로 가는 길목 천수와 난주를 거쳐 사막의 복판까지 진출이다. 실크로드와 불교미술의 보고(寶庫)인 '석굴기행'을 겁 없이 따라나섰다. 짬이 나면, 황하문명의 태동지도 기웃거려 볼 참이고. '지대물박'의 저자 소현숙 박사와 미술사를 전공한 젊은 연구자들 틈에 끼어, 10월 27일 인천공항에서 10시 비행기로 출발했다. 늦가을 창공은 더없이 높았고 짙은 코발트빛이었다. 3시간 30분 비행 끝에 서해를 건너 '시안함양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여기 함양(咸陽)은 진시황제 제국의 옛 도읍지였고, 시안과는 25km 남짓 떨어져 있다. 마중 나온 길림성 출신 황선생과 함께 버스에 올라 공항을 벗어나자, 가느다란 물줄기가 도시 외곽을 따라 실낱처럼 흐르고 있었다. 강태공이 문왕과의 조우를 위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렸다는, 바로 그 위수(渭水)였다. 열흘 전 비가 내렸다지만, 여의도 샛강 물줄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량이 졸졸거렸다.
 
▲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가는 길
▲ 병마용갱에서 출토 청동마차와 마부
첫날 우리는 함양원에 잠시 들렀다. 이곳은 전한(前漢) 시대 황실의 무덤들이 자리한 곳이다. 그 가운데 첫 답사는 전한의 4대 황제였던 경제가 묻힌 양릉이었다. 그는 한고조 유방(劉邦)의 손자이며 문제의 아들로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추구하며 백성의 안위와 평화를 최우선시했던, 덕치주의 군주였다. 그래서 그런가, 그의 무덤 주변엔 훤칠한 백송이 허연 수피(樹皮)를 드러낸 채, 호위무사처럼 늠름하게 도열해 있었다. 황제의 능에 86기나 되는 배장갱(陪葬坑)이 딸려있고, 그 위에 박물관이 세워졌다. 기병과 보병의 마차 수레 등 병기가 청동기 철기 금은 금속제품으로 제작되었다. 마차의 부품 이음새가 얼마나 정밀한지 24배의 확대경을 들이대고야 접합점을 찾을 정도로 촘촘했다. 금방이라도 바큇살이 굴러갈 듯 부품 하나하나가 정교했다. 도용(陶俑)과 각종 생활용품도 빠짐없이 차려져 있었다. 무덤 속에 넣은 부장품 살림살이가 넉넉해 그 속에서도 천년만년 살고지고 영화를 누릴 것 같았다. 그러나 화려함 뒤에는 슬픈 사실도 있었다. 무덤 조성에 동원된 죄수 일만 명의 시신도 그곳에 함께 묻혔다는 사실이…. 양릉 아래쪽으로 흐르는 물빛은 탁했고 그 위쪽에서 흘러온 강줄기는 물색이 맑았다. 경수와 위수가 합수되는 지점엔 푸르고 누런 물빛의 경계가 분명했다. 바로 그 '경위분명(涇渭分明)'이란 고사가 나오게 된 현장이었다. 답사팀은 늦은 저녁을 먹고 함양에서 출발, 감숙성 천수를 향해 달렸다. 깜깜한 이국의 밤하늘, 허리가 휘청 휜 상현달이 낮게 떠서, 황토고원을 달리는 우리 버스를 계속 길라잡이 해주었다.
 
▲ 맥적산석굴 오르는 잔도
▲ 맥적산 석굴 사천왕

△맥적산석굴과 납초사

둘째 날, 오전에는 맥적산석굴을, 오후에는 수렴동의 납초사(拉梢寺)를 찾았다.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 전, 천수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45km 떨어진 맥적산으로 출발했다. 진령산맥 서북단에 붙어 있는 산이 보릿단을 켜켜이 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맥적(麥積)'이란 이름을 붙였다니, 과연 이름에 걸맞았다. 붉은색 사력암(砂礫岩)의 거대한 덩어리가 단일 봉우리(1,671m)로 우뚝 솟아있으니, 커다란 노적가리처럼 보였다. 이처럼 깎아지른 벼랑에 누가 맨 처음 굴을 파기 시작했을까? 자료에 의하면, 오호십육국 시대 후진(後秦) 사람들이었다고 하니, 이곳은 천 년 이상 신앙촌으로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다행히 맥적산 토질은 전체가 사암질이어서 굴 파기엔 좀 용이했을 듯싶다. 탐방객들은 석굴 입구 북동쪽에서 시작하는 잔도에 오르면 중도에 돌아설 수 없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일방통행 길을 지그재그로 통과해서 서쪽으로 떨어진다. 철제난간을 짚고도 밑을 내려다보면 까마득해서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이 몰려 정체되는 구간에서는 잠시 꾀를 피웠다. 한쪽 몸을 난간에 기댄 채 건너 진령산맥의 만추에 젖은 진경(眞景)을 한껏 취해 보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이 낭떠러지에 목재를 박아 처마를 잇고 감(龕)과 굴(窟)을 파고 진흙을 이겨 천정과 벽면을 바르고 그 안에 여래와 보살상들을 모셨다. 석가와 함께했던 그 시절 제자들 모습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부조나 소조상들의 캐릭터가 활기차고 생생했다. 뒷배경의 불화도 화려한 색감으로 장식되었다. 여기 모셔진 부처만도 일만 구가 넘고 불화를 펼쳐 이으면 천 평 방이 넘는다 하니, 그 염원과 불심이 하늘에 가닿았을까? 그들은 죽음 이후의 내세만을 위해 평생토록 이곳에서 수행 정진하며, 현세를 다 쏟아부었단 말인가? 무려 221곳의 석굴 작업에 매달려 굴을 팠던 그들의 땀방울 공력은 지금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을까? 그들은 지금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정토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계실까? 여기 133호 굴에서 얻은 사진, 미소년 승려상(동양의 모나리자란 별칭을 얻음) 미소가, 내게 '그렇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 맥적산석굴 미소년 승려상
▲ 수렴동 납초사로 가는 길

수렴동 납초사를 찾아가는 길은 좁고 깊었다. 소형 전기차에 옮겨타고 비포장도로를 탈탈거리며 빨려들듯 골짝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불교 미술사'를 공부하러 들어가는 골짜기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노자 말씀이 떠올랐다. 그분께서 앞장서서 헤르메스(여행자의 신)의 지팡이를 짚고 안내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또한 무슨 조홧속인가? 검은 바위산 사이를 휘돌고 휘돌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던, "골짜기엔 무궁무진의 생명(谷神不死)이 들어 있으며, 그 골짜기를 검은 암컷(玄牝)이라 부르고 천지의 뿌리가 그 현묘한 암컷에 닿아있으며 면면히 이어져 오늘 존재"하는 것이란 말씀이 그대로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얼마를 들어갔을까, 전기차가 멈추었고, 건너편 천 길 낭떠러지에 어마어마한 마애불이 떡하니 나타났다. 우리 탐방객 입에서는 외마디 경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처럼, 벼랑 암벽에 새긴 조각의 미감(美感)이 한 번의 붓질로 그린 듯 활기찼다. 연꽃을 든 훤칠한 두 보살이 양옆에서 보좌하고 대불상(42m)은 연좌(蓮座) 위에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 연꽃잎 밑에는 사자 코끼리 말 등의 짐승들이 순한 모습으로 부처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영상처럼 한 장면이 펼쳐졌다. 높디높은 비계를 타고 올라와 벼랑에 몸을 묶고 공중에 매달려 바윗돌을 향해 수억만 번의 정과 망치질로 암벽을 쪼고 다듬는 석공의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이…. 오금이 저릿저릿하고 살짝 어지럼증까지 동반되는, 나의 뇌는 왜 가끔 이런 현상에 빠지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척박한 고원지대에서도 골짜기 생명들은 제가끔 가을 색깔로 제 꼴을 갖춰가고 있었다. 납초사를 내려와 우리는 위수강을 끼고 석양을 받으며 계속 서북쪽으로 달렸다. 난주로 향한 고속도로를 5시간 이상 내달리는 중이다.
 
▲ 병령사 입구

△유가협댐과 병령사석굴

난주는 황하가 흐르는 도시다. 어젯밤 늦게 란저우((蘭州 Lánzhōu)에 도착했다. 병령사(炳靈寺 Bǐnglíngsì) 석굴에 가기 위해 난주 시내에서 하룻밤 묵는다. 깜깜한 오밤중, 황하 강 줄기를 보려 호텔 창문을 열었으나 초고층 빌딩들로 가려 물빛은 한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여기 근처에서 흐르고 있을 텐데…. 광활한 대륙 한복판에 자리한 감숙성 성도, 시내를 가로질러 황하가 동서로 흐르고 중산교 밑으론 누런 물결이 세차게 흘러갔다. 청해성 곤륜산에서 발원한 황하는 난폭하게 상류를 흘러와 이 지점에서 곡선으로 휘돈다. 많은 양의 황토 입자를 실어와 '관중 지역'에 쏟아부어 옥토를 만든다. 거친 물결이 이 도시 옆구리를 치고, 다시 평온을 유지한 채 북동쪽 오르도스 평원을 향해 방향을 튼다.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유가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병령사 석굴은 감숙성 영정현(永靖縣)에서 서북쪽으로 40km쯤 떨어졌다. 영정현은 서쪽으로 하서주랑에 동쪽으로는 장안으로 통하는 실크로드의 길목이다.

란저우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10여 분쯤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붉은 적벽과 함께 누런 물결이 콸콸콸 흐르는 강줄기가 보였다.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너나없이 창가로 몰려 사진 찍기에 바빴다. 병령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유가협댐에서 배를 타야 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동관'이란 나루터였고, 여기서 구명조끼를 입고 19인승 쾌속정에 올라탔다. 유가협은 바다처럼 넓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으로 감청빛 물결이 출렁거렸다. 황토 입자가 가라앉아 뱃전을 스치는 물보라도 맑은색을 띠었다. 쾌속정은 20여 분 수평선을 달려 바위산 고봉들이 물속 깊이 뿌리를 박은 북안(北岸) 병령협으로 접어들었다. 아직은 짙은 안개에 가려진 기기묘묘한 검은 칼봉들이 제 모습을 한껏 재며, 선상 손님을 맞이했다. "아, 세상엔 이런 절경도 있구나! 지금까지 입 벌리고 감탄했던 풍광들은 그저 거기서 거기에 불과한 경치였구나!" 유장한 침묵을 깨뜨리며 쾌속정은 사뿐히 날아들었다. 신선들이나 살 것 같은 절세 비경에! 우리를 내려놓고 쾌속정은 꼬리가 보이지 않게 쾌속으로 내빼버렸다. 병령사 출입을 관리하는 입구부터는 오직 두 발로 걸어야 했다. 노랗게 물든 수양버들이 휘휘 늘어져 가을 정취를 자아냈다.

골짝은 깊었고 거대한 두 바위산이 가랑이를 쩍 벌린 채 위용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 사이로 잔도를 타고 들어갔다. 넓은 건천을 중심으로 가늘게 물길이 흘렀고 위로는 아치형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홍교(虹橋)를 건너가니, 상반신은 암벽에 조각하고 하반신은 진흙으로 만든, 높이가 무려 27m의 좌불상이 우리를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조성된 '병령사'는 티베트 장족의 일원인 강족 말을 음역한 '십만불'이란 뜻으로, 천불동이나 만불동의 의미를 지닌 것이란다. 중국 석굴 유적지는 '특굴'이란 명칭을 붙여 특별 요금을 받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여기 병령사에도 169호('서진건흥원년'이란 銘文이 새겨진 곳) 굴은 300위안(한화: 6만원)의 옵션을 선택한 사람만 입장시켰다. 미술사 전공자야 비싼 표를 끊고 들어가 유물의 디테일과 명문 하나하나를 찾아내 논문자료로 활용할 가치를 얻겠지만, 나는 비전공자로서 석굴 밖에서 헐렁하게 서성거렸다, 그러다 진짜 재미난 것과 마주했다. 잔도와 맞닿아있는 노상의 이름 없는(번호표도 받지 못한 굴) 작은 석굴들과 만났다. 고만고만한 작은 굴들 앞에는, 훼손을 막기 위해 철망을 가려놓았는데, 핸드폰 렌즈를 철망에 바짝 갖다 대면 내부의 조각상이나 불화가 선명하게 화면에 떴다. 그래서 고화질 사진도 얻을 수 있었다. 돈 많은 왕족이나 귀족이 시주 불사한 것이 아니라, 서로 친척쯤 될 하층민 풍의 진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아기자기한 서사를 내게 들려주는 듯했다. 천진난만한 동자승의 얼굴에서부터 부처님 곁에 나란히 선 아난과 가섭존자까지, 그들의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모습에 마음이 금방 편안해졌다. 지금은 유가협댐으로 둘러싸여 고립되었지만, 석굴이 조성될 시기에는 아마도 저 아래쯤에 사하촌이 있었을 것이고, 그 동네 살던 석공이나 화공의 조수로 심부름하던 사내아이들이 여기 모델이 되었을 성싶다. 조성 기간만도 천 년 이상 이어졌다 하니, 역사 속에서 석굴 주인공 얼굴들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여러 민족이 이 땅을 차지했고 거쳐 갔으며, 불교 진리를 찾는 신앙 역시도 변화가 많았음을 보여주었다. 어느 해 물벼락에 깎여나간 절벽, 혹독한 기후에 살아남은 동식물의 진화 상태, 그리고 인간들의 고된 삶에서 그 어쩔 수 없었던 것들, 세월 켜켜이 새겨진 발자취 그 무늬를 채집하고 줍는 일이, 바로 나의 답사목적이기도 하다.
 
▲ 막고굴 보살상

△둔황 막고굴과 명사산 월아천(月牙川)

란저우역에서 오후 4:30발 기차를 탔다. 14시간 동안 달려 새벽녘에 둔황(敦煌 Dūnhuáng)에 떨어질 야간열차다. 네 사람이 아래위에서 잘 수 있는 침대칸에 들었다. 밤새 하서주랑을 끼고 서북쪽으로 달릴 것이다. 기련산과 합려산 오초령 산맥들을 넘나들며 황하 건너편 서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회랑 도시들을 어둠 속에 두고 통과해야 하다니…. 무위 장액 주천 가옥관, 동서교류의 황금 통로였던 이 도시들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감숙성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길쭉한 호리병 모양으로 생겼다. 북서쪽으로 길게 뻗은 주둥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둔황이다. 타클라마칸사막(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림)으로 들어가는 중국 측 입구에 해당하는 요충지다.

네 사람이 자리를 정해 침대에 몸을 꾸부려 눕혔을 때, 다행스럽게도 내 자리가 창 쪽이었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석양이 막 떨어지고 있었다. 희뿌연 하늘과 붉은 저녁놀이 깔린 아스라한 벌판은 그야말로 이국의 정취 그대로였다. 우리는 저녁으로 도시락을 나눠 먹었고, 네 사람의 수다가 도란도란 이어졌다. 해가 꼴딱 떨어지자, 중원의 밤이 금방 찾아왔다. 서쪽 하늘엔 금성보다 먼저 상현달이 나타났고, 허리가 휘청 휘었던 달은 반원으로 도톰하게 허리가 회복되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모든 역을 빠짐없이 정차하며 1,060km를 달리는 완행열차였다. 덜컹덜컹 열차는 거친 숨을 토하고 나는 잠이 들둥말둥 비몽사몽 낯선 시간이 길게 흘러가는 밤이었다. (제2부로 이어짐.)

유경숙 소설가 : '청어남자' '백수광부의 침묵' '베를린지하철역의 백수광부'소설집과 '세상, 그물코의 비밀' 산문집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