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화 수용에 거리낌 없는 청년들, 그 배경은 일본에 대한 자신감 [이동수의 세대 진단]
과거사 문제에선 상당히 강경한 태도 보이기도
(시사저널=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연간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지난 8월 개봉해 현재까지 565만여 관객을 동원한 《귀멸의 칼날》은 11월22일 한국 영화 《좀비딸》을 제쳤다. 비단 이 작품뿐 아니라 2025년 국내 극장가는 일본 애니메이션 열기로 뜨거웠다.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은 330만여 명이 관람하며 올해 6위를 기록 중이고,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은 이미 OTT 등을 통해 공개된 내용임에도 95만여 관객을 동원했다.
이 작품들의 내용은 2023년 열풍을 일으킨 《스즈메의 문단속》이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비해 대중적이지 않다. 예전 같으면 '오타쿠'들이 즐기는 작품으로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일본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 대중문화 시장에서 명실상부한 주류가 되었다. 열풍을 주도하는 건 2030세대다. 이 세대에서 나타나는 높은 일본 애니메이션 수용도는 일본에 대한 세대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 소년 만화와 함께 성장해온 MZ세대
만화·애니메이션 등 일본 대중문화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다. 주요 루트는 PC통신이나 '해적판' 불법 복제품. 《드래곤볼》 《슬램덩크》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의 작품은 문화 개방이 진행되기 전이었음에도 입소문을 타고 X세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일본 대중문화 유입을 막는 게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1998년 10월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대중문화 시장 개방에 합의했다. 이때부터 2003년 9월까지 4차례에 걸쳐 대중문화 시장이 단계적으로 열렸다.
개방 초기 우리나라로 들어온 작품들에는 번안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의 반일 감정이 상당한 편이었고, 시장 개방으로 일본 콘텐츠들이 우리나라 대중문화 시장을 잠식할 거란 우려도 적지 않았다. 수입·배급사들은 이를 고려해 작품 속 캐릭터들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꿨다. 예를 들어 《슬램덩크》의 주인공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강백호'로, 《이누야샤》의 주인공 '히구라시 카고메'는 '유가영'으로 바꾸는 식이다.
기술의 변화는 대중문화 시장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OTT 이용 활성화가 일본 애니메이션 인기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면 2000년 전후엔 인터넷이 있었다. 가정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며 일본 콘텐츠에 대한 개인의 접근성이 확대되었다. 다양한 소재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은 한국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우리나라에 정식 수입되지 않은 작품도 탐닉하곤 했다.
2000년대는 마침 일본에서 대작 만화들이 쏟아진 시기였다. '원나블'이라는 통칭으로 불리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는 그중에서도 대표로 손꼽혔다. 일본 슈에이샤의 만화 잡지 '소년 점프'에 연재된 이 작품들은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최근 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에 '원피스 해적기'가 등장한 건, 이 작품이 전 세계 청년들에게 끼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만화는 보통 연재를 시작하면 완결까지 10년 이상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1997년 7월 연재를 시작한 《원피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사이 세계적으로 단행본만 5억 부 넘게 판매되었다. 《원피스》 주인공 '루피'에 열광했던 초등학생들은 이제 청년을 넘어 장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만큼 과거 애들이나 보는 거라는 인식이 강했던 만화와 애니메이션 팬층의 연령대도 높아졌다. 2030이 《귀멸의 칼날》 열풍을 주도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 셈이다.
'한류 콘텐츠' 뒤처지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소년 만화를 접한 2030세대에게 일본의 역사나 문화는 낯선 게 아니다. 《귀멸의 칼날》만 하더라도 일본 다이쇼(1912~26) 시대 검사(劍士)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기성세대 중엔 역사적인 이유로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청년들은 개의치 않는다. 배경만 다이쇼 시대일 뿐, 내용은 역사적인 것과 무관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향한 관심은 일본에 대한 호감으로도 이어진다.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의 겐론NPO가 2013년부터 2021년까지 9년간 진행한 '한일 국민 상호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세대 중 2030세대가, 2030세대 안에서도 20대의 일본 호감도가 높은 걸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국민은 대체로 일본에 대한 '비호감'이 '호감'보다 많은 편인데, 18~29세의 경우는 시기에 따라 호감도가 비호감도를 웃돌기도 했다.
30대도 정도만 약할 뿐 20대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일본 대중문화 소비와 비례했다. 2021년 조사에서 18~29세의 41.5%가 일본 대중문화를 즐긴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30대 21.8%, 40대 13.1%로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내려갔다. 젊을수록 상대국 대중문화 소비율이 높다는 건 일본도 우리와 같았다.
그렇다고 2030세대가 모든 영역에서 일본에 호의적인 건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서 이들은 상당히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윤석열 정부 당시의 대일 외교 기조에도 비판적이었다. 문화와 역사를 분리해 바라보는 '투트랙' 자세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청년들이 일본 대중문화를 즐기면서도 과거사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배경에는 자신감이 깔려있다.
지금의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일본은 열등감을 가질 만한 상대가 아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을 넘보는 나라였다. 우리는 이제 막 도약한 개발도상국이었다. 1990년 일본의 1인당 GDP는 약 2만5000달러로 약 6500달러였던 우리의 4배에 달했다. 그 격차는 2000년대 들어 점점 좁혀지더니 2020년대에 역전되었다. 한류 콘텐츠는 일본 애니메이션 못지않게 전 세계를 열광케 하고 있다. 우리가 뒤처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귀멸의 칼날》의 연간 박스오피스 1위 등극은 더 이상 일본 애니메이션이 비주류가 아닌,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에는 문화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2030세대가 있었다. 다음에는 어떤 문화의 물결이 일렁이게 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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