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폭파사건 38주기... 누가 김현희의 입을 막았나 [호준석의 역사전쟁]
29일(2025년 11월 29일)은 김일성·김정일 북한 정권이 대한항공기를 폭파해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목숨을 잃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38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이 엄청난 비극을 되짚어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는 88 서울 올림픽 개막이 열 달도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 체제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북한 정권에게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굴욕이고, 체제 경쟁에서의 영구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LA 올림픽이 모두 반쪽으로 개최돼 88 올림픽은 12년 만에 열리는 전 세계의 축제였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를 막고 싶었던 북한 정권은 공산권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하도록 총력 외교전을 펼쳤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끝내는 올림픽 전초전 격인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개회 1주일 전 김포공항에서 폭탄을 터뜨려 5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치는 테러까지 자행했습니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떠나 서울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858편에는 승객 95명, 승무원 2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레바논과 인도 국민 1명씩을 빼고는 전원 한국인이었고, 중동에서 땀 흘려 일하다 설레는 귀국길에 오른 근로자 56명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중간 기착지 아부다비를 거쳐 두 번째 중간 기착지 방콕으로 향하던 도중 인도양 미얀마 해역에서 갑자기 교신이 두절됐습니다. 공중에서 대형 폭발을 일으켜 바다로 추락한 것입니다. 승객과 승무원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올림픽 개최를 앞둔 국가에서 발생한 엄청난 비극에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1983년 뉴욕발 서울행 대한항공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269명 전원이 숨지는 비극을 겪은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2월 1일 일본인 남녀 2명이 중동 바레인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출국하려다 위조 여권이 적발돼 검거됩니다. 70세 남성 하치야 신이치, 25세 여성 하치야 마유미 ‘부녀’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검거되자마자 담배갑에 숨겨둔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어 자살을 기도합니다. 남성은 즉사했고, 여성은 앰플을 깨문 직후 빼앗기는 바람에 붙잡혔습니다. 만약 자살 시도가 성공했다면 이 사건의 진실은 지금까지도 묻혀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들이 폭파된 대한항공기에 탑승했다가 첫 번째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렸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어 자살하는 것은 북한 공작원들의 전형적 수법이었고, 숨진 남성의 치아에서는 북한식 납땜 흔적이 발견됩니다. 살아남은 여성 마유미는 12월 15일 국내로 압송됩니다. 부녀로 위장했던 이들은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였습니다.

이들은 폭파 사건 17일 전인 11월 12일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 부다페스트, 빈을 거쳐 이라크에 입국합니다. 이동하는 동안 북한 요원에게 액체 폭발물과 기폭 장치, 그리고 일본 위조 여권을 건네받았습니다. 11월 28일 밤 11시 반 바그다드에서 대한항공 858편에 탑승한 김승일과 김현희는 자신들이 앉은 7B, 7C 좌석 부근 승무원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시한폭탄을 설치한 뒤 첫 번째 중간 기착지 아부다비에서 내렸습니다. 당시 아부다비에서는 15명이 내렸고, 11명이 새로 탔습니다. 이들이 설치한 시한폭탄은 맞춰진 시각에 인도양 상공에서 폭발했고, 이들은 바레인까지 위조 여권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바레인에서 로마로 출국하려다 덜미가 잡힌 것입니다.
저는 사건 발생 28주기를 앞두고 있던 2015년 11월 27일 YTN 앵커로 있을 때 김현희 씨를 생방송으로 인터뷰하면서 사건의 전말을 직접 들었습니다. 김현희 씨는 아버지가 외교관, 어머니는 교사인 상류층 출신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쿠바에서도 살았고 아역 배우도 했습니다.

평양외대 일어과에 다니면서 외교관을 꿈꾸던 어느날, 중앙당 대외정보부서에서 나와 학생들을 면접하더니 몇 사람을 선발해 승용차에 태워갔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만 최고권력기관에에서 뽑아서 가니 좋은 데로 간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김현희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일본인화, 중국인화 교육을 7년 8개월 동안 받았고 해외 실습도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10월 중국 광저우에서 중국인화 실습을 받던 중 갑자기 소환됐습니다. 이런 지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서울 올림픽은 ‘두 개의 조선’을 조작하는 책동이니 이것을 막고,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비행기 한 대를 제껴라.”

8년 가까이 훈련받았는데 마침내 부장이 나와서 직접 임무를 시달한데다 ‘수령님이 나를 신임해서 큰 임무를 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데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때 나는 혁명 전사였고 어떻게 하면 임무를 수행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답했습니다. 또 다른 공작원 김승일은 당시 70세로 장기간 해외 공작을 한 노련한 공작원이었고 1984년에는 위조 일본 여권으로 한국에도 잠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김승일이 ‘해당 대한항공기의 노선이 공작하기에는 좋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상부에서는 ‘이미 김정일에게 보고가 끝났다’며 묵살했다고 김현희는 증언했습니다.
스스로 ‘혁명 전사’라 여긴 김현희가 마음을 바꾼 것은 대한민국의 실상을 본 뒤였습니다. 김현희는 한국에 압송돼서도 8일 동안은 마유미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수사관들의 얘기를 듣고, 눈으로 보게 되는 모든 물건들, 그리고 외부에 나가서 본 대한민국의 모습이 북한에서 교육받은 것과 너무 달랐기에 ‘거짓말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보면 알게 된다”라고 김현희는 말했습니다. 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교육받은 항공기 폭파가 무고한 동족상잔이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감히 내가 살아남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죽더라도 진실은 밝히고 죽자”고 생각하고 1988년 1월 15일 사건 전모를 자백합니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김현희에게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나 4월 12일 노태우 대통령은 김현희에 대해 특별사면을 실시합니다. 이 사건이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선을 불과 18일 앞두고 일어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권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이 우리 사회 일각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됐습니다. 진상이 다 드러난 뒤에도 북한 정권은 국제사회에서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뻔뻔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범인이자 유일한 증인이 사라지면 ‘증거를 인멸했다’며 음모론은 더 힘을 얻고 진실은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김현희 씨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은 오랜 기간 끈질기게 계속됐습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정권 차원에서 과거사위원회 재조사까지 벌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음모론이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과 좌파 세력은 시신과 잔해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사건에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는 것처럼 문재인 정부 때까지도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광우병, 천안함, 세월호, 사드 전자파, 후쿠시마 오염수가 그렇듯 비뚤어진 신념이 팩트와 진실을 뒤덮어 버리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았고, 그들은 명백한 진실이 드러나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김현희씨를 인터뷰했을 때 김현희씨는 희생자와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책을 써서 받은 수입 전액을 유족들에게 전달하고 직접 만나 사죄했지만 그것으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자살하지 않고 자백했다는 이유로 김정일은 그녀의 가족과 친척, 교육을 맡았던 노동당 조사부 간부들까지 모두 수용소에 집어넣으라고 직접 지시했습니다. 이것은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1995년 말 아들 이한영 씨와 전화 통화에서 증언한 내용입니다. 김현희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나를 살려준 것은 진실을 밝히고 지키라는 뜻이라 생각하고 그런 사명감으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 때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할 때의 목소리는 단호했습니다. 갑자기 음모론을 제기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지상파 방송들까지 나서서 괴담을 부추기고, 국정원에서는 해외 이민을 종용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자 집 주소가 노출돼 당시 어린 아기였던 아이들 둘을 업고 쫓겨나다시피 도망쳐야 했다고 합니다. 과거사위 조사에는 좌파 인사들이 들어가서 김정일이 이 사건을 지시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려고 몰아갔다고 합니다. 보수 정부로 바뀐 뒤에도 이런 일들에 대한 국정원의 사과는 한 번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김일성·김정일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북한은 테러집단으로 규정돼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고, 공산권 국가들이 오히려 서울 올림픽 참가 의사를 굳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벽을 넘어서’라는 모토로 열린 서울 올림픽이 성대하게 치러진 뒤 다음해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고, 소련과 동구권 공산정권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어릴 때 납북 일본인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는 김현희의 진술은 의혹만 있던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3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 일각의 음모론 역시 앞으로도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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