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총 두려웠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계엄의 밤’을 기억하는 시민들 [비상계엄 1년-그날의 기억]
21살 청년까지 이어져 온 연대의 힘
“하나둘 모여드는 불빛에 안도했다”
제2계엄 저지하려 국회 지킨 시민들

[헤럴드경제=이용경·안효정 기자] 12·3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났다. 한밤중 느닷없이 선포된 계엄은 단 몇 시간 만에 국회의 해제 결의로 무력화됐지만, 그날의 기억은 국회 안팎에 있었던 이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시민의 몸과 마음속에 깊이 각인됐다. 헤럴드경제는 국회로 향했던 시민들, 그리고 현장에서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막았던 보좌진과 당직자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공기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을 되짚었다.
▶‘역사의 시간’으로 끌려 들어갔던 시민들 = 신재형(67) 씨는 1972년 유신과 1980년 광주를 모두 경험한 세대다. 그날 밤 유독 이른 저녁에 잠이 들었던 신씨는 울면서 달려 온 아내로부터 계엄 소식을 들었다. 45년 만이었다. “처음에는 해외에 있는 아이들이 큰 사고를 당한 줄 알았죠. 그런데 TV를 켜니 계엄이라더군요.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만든 민주주의를 건드렸다는 분노가 먼저 느껴졌습니다.”
고교 재학 시절 유신 철폐 시위로 길거리에 직접 섰던 신씨. 그는 1980년 군 복무 중 광주에 있던 친구 여럿을 잃었다. 그는 그때 이후로 “혼자 살아남은 이유를 평생 고민해 왔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은 나에게 빚 같은 것”이라며 “12월 3일 그날도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이 나를 움직였다”고 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여의도로 향했다. 이미 국회 철문 앞에는 시민들이 모여 ‘윤석열 탄핵’을 외치던 상황. 신씨는 화분 위에 올라 “윤석열을 내란죄로 처벌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탄핵은 지난한 정치적 과정이 필요한 결과의 의미를 갖지만, 내란은 당장 현장에서 시민을 한데 결집하는 언어라고 봤어요. 그 말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대략 200명 넘는 사람들이 구호를 바꿔 외치기 시작했거든요. 사태의 본질을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역시 국회 앞으로 나갔던 고경리(55) 씨와 대학생 한승희(21) 씨도 그날을 ‘역사의 시간 속으로 끌려 들어갔던 순간’으로 기억했다. 고씨는 “현장에 가는 일은 분명 두려웠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더 모였다”며 “휴대전화 불빛으로 밤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순간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지는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한씨도 “계엄군이 총을 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국회에 가지 않으면 평생 부채감에 후회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생사의 위험을 감수하고 국회로 달려갔던 시민들은 계엄 해제 이후에도 탄핵 집회, 남태령 집회 등에 참여하며 연대의 힘을 느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신씨는 “시민들이 겪은 집단적 승리의 경험은 평생 갈 것”이라며 “특히 젊은 세대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방식으로 집회에 참여하는 모습을 봤을 때는 기성세대로서 정말 대한민국의 희망을 느꼈다”고 했다.
고씨와 한씨는 한겨울 탄핵 정국에서 은박지를 몸에 걸친 채 시위에 참여한 일명 ‘키세스단’(담요로 몸을 감싼 모습이 초콜릿 포장지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다.
고씨는 “계엄을 막아냈던 그날의 경험 이후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이 다시 생겼다”며 “또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패딩을 더 두툼하게 입고 국회로 향할 것”이라고 했다. 각종 시민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한씨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 광장에서 터져 나온 여성·성소수자·장애인·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이후 조금씩 지워지는 게 아쉬운 마음”이라며 “우리 청년세대의 가장 큰 과업은 독재에 저항했던 앞선 세대의 희생을 잊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계엄 저지 위해 앞에 나섰던 국회 사람들 = 그날 밤 국회의원들과 가까운 거리에서는 계엄 저지를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당직자인 이광희(30) 씨는 계엄 선포 소식을 듣고 “제발 민간인 피해만은 없길 기도했다”고 회상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할 줄은 몰랐어요. TV에서 ‘반국가 세력 척결’이라 말을 듣는 순간, 폭력이 동원될 거라는 직감이 왔습니다.” 그는 발포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아버지의 차를 타고 국회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당직자 텔레그램 방에 떨어진 임무는 계엄 해제 의결을 위해 의원들이 본회의장 안으로 진입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현장에 있던 보좌진들과 목마에 태우듯 밀면서 의원들이 국회 담장을 넘도록 도왔다. “해제 결의 이후에도 국회를 떠나지 못했어요. 다시 계엄이 선포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새벽까지 시민들과 함께 국회를 둘러싸며 지켰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추운 날씨에 담요 하나 덮고 버틴 시민들 한분 한분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인 유신욱(31) 씨는 그날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몸으로 막은 보좌진 중 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딥페이크 영상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다들 국회로 모이라고 하니 진짜 현실이었죠.” 유씨는 처음에 계엄군과 몸을 밀치며 격하게 대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넘어지면 일으켜주는 상황이 됐다고 기억했다. 그는 “군인들도 억지로 국회 안에 들어오려는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2·3 계엄 1주년의 소회는 어떨까. 이씨는 “이번 비상계엄은 제2의 세월호 참사처럼 느껴진다”며 “계엄은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책임자에 대한 명확한 처벌과 숨겨져 있는 진상 규명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씨도 “국회로 달려와 준 시민들 덕분에 계엄을 막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탄핵 정국이나 선거 과정에서도 시민들의 참여 의식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인권단체들 “12·3 계엄은 인권침해의 역사” = 헌법과 국제법에 어긋난 비상계엄이 선포됐던 당시 인권단체들 역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시민들의 인권이 침해받는 사태를 우려해서다. 국제앰네스티 등 주요 단체들은 계엄의 밤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대선 앰네스티 활동가는 “당장 (국회로) 나가지 않는다면 평생 부채감을 갖고 살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당시 이씨는 국회 앞 상황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기록해 지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현장에 나간 활동가들이 전한 국회의 상황을 토대로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비상계엄령 선포가 부당행위이기에 강력히 비판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이 단체는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나서도 탄핵 찬반 시위 등 서울의 집회 장소를 찾아다니며 인권침해 사례가 없는지 모니터링 작업을 벌였다. 김동현 조사관은 “공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 표현의 자유와 기본권이 침해받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세히 감시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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