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스러운 리메이크, 감독은 답하라! [.txt]
원작이 품었던 풍부한 저항 층위 훼손
기후위기·생태에 초점을 맞췄지만
극우가 좋아할 음모론으로 퇴행시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한편 꼽으라면 역시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2003)다.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이 영화의 모든 걸 사랑하진 않지만, 비평적 거리를 유지할 때에도 그 지독한 열정을 놓기는 어렵다. 과장 없이 100번쯤 본 영화. 그렇게 매분 매초를 외우는 영화가 리메이크판으로 돌아왔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2025)다.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 부고니아’ 는 2025 년에 부응하는 업데이트 판이다 . ‘ 지구를 지켜라 !’ 가 개봉했던 2000 년대 초는 이제 막 ‘ 인류세 ’ 라는 개념이 제출되고 , 전문가들이 인간이 초래할 여섯번째 대멸종을 경고하기 시작한 때였다 . 하지만 대중들은 대체로 시큰둥했다 .
20년 후, 사정은 달라졌다. 기후위기는 기후재난으로 이어졌고, 벌의 멸종은 모두의 악몽이 되었다. 이와 함께 란티모스도 작품의 초점을 ‘지구’(globe)에서 ‘푸른 행성’(green planet)으로 돌렸다. ‘지구’란 인간이 이 행성의 주인이라 여기는 태도를 반영하는 용어라면, ‘행성’은 인간이 아닌 지구 거주자들까지 포괄하는 생태적 개념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외계인이 지구를 지배한다고 믿는 병구(신하균)가 유제화학의 강사장(백윤식)을 납치하면서 시작된다. 유제화학은 노조 탄압과 산재 등 각종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악덕 기업’이고, 그는 강사장이 간부급 외계인이라고 생각한다. 계급 피라미드의 최말단에 있는 병구와 최상위에 있는 강사장 사이에 쫓고 쫓기는 두뇌 싸움이 시작되고, 이야기는 당시까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로 치닫는다. 지구의 폭발이었다.
영화는 우주를 가로지르는 가부장적 폭력을 모든 사건의 전제로 삼으면서, 외계인이(그렇다, 강사장은 외계인이었다) 지구인을 식민화하고, 1세계가 3세계를, 남자가 여자와 어린이를 식민화하는 과정을 이미지화 한다. 여기에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식민화가 겹쳐진다. 병구가 구하려 했던 지구는 폭력의 연쇄 고리 안에서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공간이었다.
하지만 이 천재(!)적인 작품이 충분히 다루지 않았던 게 있었으니, 그건 ‘문명’에 의한 ‘생태’의 식민화였다. 벌의 멸종을 염려하는 테디를 통해 ‘부고니아’는 이 부분에 집중하면서, 거대 바이오 회사가 어떻게 다양한 생명종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 오는지 조망한다. 그렇게 ‘지구 행성’이라는 주제가 영화의 전면에 부각된다.
두 작품의 결말이 다른 건 이 때문이다. 인류에게 실망한 강사장은 지구를 폭파시켜 버리지만, CEO 미셸(에마 스톤)은 인간의 목숨만 싹 거둬들인다. 강사장에게 자신들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고, 따라서 지구는 파괴해야 할 인류 문명과 하나다. 그러나 미셸에겐 그렇지 않다. 제거되어야 할 것은 푸른 행성을 빌려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주인인 줄 아는 우매한 인간뿐이다. ‘부고니아’의 결말은 “인간이 이처럼 탐욕스럽게 군다면 결국 멸망하는 건 인류일 뿐”이라는 서늘한 경고를 시각화했다.
흥미롭게도 원작에서 지구가 폭발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 후 유일하게 남겨졌던 TV 가 리메이크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다른 말로 하자면 , 무엇보다 생명력이 질긴 ‘ 미디어 ’ 가 지난 20 년 간 푸른 행성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는 의미다 . 그건 극우 음모론자의 탄생이다 . ‘ 부고니아’ 는 자본가에게 맞서는 노동자 남성에 대한 상상력 역시 2020 년대에 맞게 조정했다 .
원작은 위계와 착취에 저항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병구가 원자화된 개인의 폭력을 혁명의 도구로 삼았을 때, 저항이 어떻게 실패하는지 보여준다. ‘부고니아’에 이르면 이 저항은 좀 더 퇴행적으로 뒤틀린다. 테디가 맞서는 존재가 ‘정치적 올바름’을 가면으로 삼아 성공한 기만적인 ‘여성 기업가’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테디가 바라는 건 ‘평등’이라기보다는 ‘원한을 담은 보복’에 가까워져 버린다.
이는 테디에겐 좀 부당한 평가일지 모른다. 하지만 ‘부고니아’는 원작이 구축한 세계사의 구조에 대한 이해와 저항의 풍부한 레이어를 훼손함으로써 테디를 그저 ‘망상에 사로잡힌 레드넥(가난하고 교육 수준 낮은 시골 백인)’으로 추락시켰다. 특히 리메이크는 ‘병구의 일기’ 시퀀스가 보여줬던, 병구가 경험한 다층적인 사회적 폭력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동성 성추행만을 덜렁 남겨놓았다. 이건 해명이 필요한 각색이다. 게다가 테디는 에코 파시스트의 면모 또한 보인다. 경계선 지능장애인인 사촌동생을 화학적으로 거세하면서까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페미니즘과 퀴어 담론뿐 아니라, 생태운동 자체도, 그 가장 어두운 면모를 부각시킴으로써 의심한다.
사회 진보 운동을 비판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시스템과 역사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음모론에 심취한 채, ‘오로지 나만이 진실을 안다’라는 왜곡된 자아상을 비대하게 키우는 건, 지금/여기의 극우가 땔감으로 삼는 세계관이란 점만은 짚고 싶다. 이 영화가 강화하는 음모론이란 미셸이 외계인이라는 주장이 아니다.(놀랍게도 이는 진실이다.) 그보다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말하는 시스템이 지구 착취를 위한 협잡의 소산이며, 생태정의운동이 파시즘적이라는 게 음모론이다. 이건 단순한 시대 맞춤형 업데이트 이상의 정치적 변형을 내포한다. 왜 이렇게까지 원작의 의미를 훼손했는지, 란티모스에게 질문하고 싶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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