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흙은 모두 재앙에서 시작했다 [.txt]

최윤아 기자 2025. 11. 2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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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딸과 아내의 죽음…연이은 ‘삶의 재난’
절망 대신 탐구 택한 과학자 아내를 보다
“과학은 태도…호기심이 삶을 구원한다”
지은이 앨런 타운센드. ⓒ Sue Bell Art and Design

1000억분의 3의 불행이 들이닥쳤다. 네살배기 딸이 뇌암 진단에 이어 수술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아내마저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예후가 좋지 않은 교모세포종이다. 그는 평생 지구와 원소의 상호작용을 연구해 온 과학자였다. 어떤 문제든 과학이 해답을 주리라 내심 믿어온 (샤이) 과학 맹신론자였다. 그런 그 앞에 까마득한 확률을 뚫고 당도한 불행은 묻고 있었다. 과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과학은 삶에 무기가 되는가.

‘우주의 먼지로부터’는 미국의 생물지구화학자 앨런 타운센드가 쓴 에세이다. 10여년 전 겪은 딸 네바의 두개인두종 진단과 투병, 이어진 아내이자 동료 생물학자 다이애나의 뇌종양 진단과 사망을 겪으면서 재정의한 과학의 의미와 효용에 대해 썼다. 아마존의 흙 내음과 병동의 포르말린 냄새를 오가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한 인간에게 닥친 ‘재앙’ 수준의 사건이 어떻게 ‘재생’으로 탈바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타운센드는 현장 연구를 즐기는 생명지구화학자였다. 연구실이 아니라 아마존 열대 우림에서, 총알개미에 수시로 물려가며 지구와 원소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연구했다. 연구용 나뭇잎을 따겠다고 겁 없이 엽총을 수십발 쏘아대던 이 남자의 삶은 의사의 한마디에 “분자 수준부터” 변화해 나가기 시작한다. “따님의 엠아르아이(MRI)에서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또래가 쉽게 하던 평범한 동작을 엄두도 못 내던 딸. 한달에도 며칠씩 두통이 심해 앓아눕던 딸. 과학자는 문헌 검색만으로도 딸의 진단명을 알아맞췄지만, 과학을 업으로 삼은 이가 누리는 약간의 이득은 여기까지였다. 여느 부모처럼 그는 패닉에 빠졌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내 다이애나가 있었다. 박테리아 군집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유능한 생물학자. 뼛속부터 과학자. 그녀는 주치의를 만나기 전, 무자비한 검사로 겁에 질린 아이를 아이스크림으로 달래 주는 그 짧은 시간에 노트북을 열어 두개인두종 관련 논문을 검색하고 주치의에게 해야 할 질문 리스트를 작성한다. 의심하거나, 부정하거나, 화내거나 하지 않고, 검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채비를 한 것이다. 병동을 나오고는 이 분야 세계적 권위자에게 메일을 보내 방사선 치료 여부 등을 의논하고, 관련 학회에까지 참석해 다양한 최신 치료법을 탐색한 후 최종 치료법을 결정한다.

우주의 먼지로부터 l 앨런 타운센드 지음, 송예슬 옮김, 문학동네, 1만8000원

수술 이후 딸의 종양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되던 시기, 이번에는 다이애나 자신이 시험대에 오른다. 팔의 통증으로 신경외과를 방문했다가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은 것이다. 교모세포종을 진단받은 이의 절반이 1년 이내에 사망한다고 알려져 있다. 병원을 나서면서 다이애나는 말한다. “이딴 걸로 남극에 못 가면 안 되지.” 머리카락을 모두 밀고 뇌 수술을 받은 직후에도 다이애나는 병문안 온 동료 과학자와 자신의 ‘남극 프로젝트’(남극에서 박테리아 군집 연구)에 적용할 이론을 찾는 데 몰두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왜 하필 내게’를 묻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겠지만, 다이애나는 호기심의 방향을 자기 밖으로 돌린다. 그럼으로써 ‘매몰’ 대신 ‘몰두’를 선택한다. 그런 아내를 지켜보며 지은이는 과학을 재정의하기 시작한다. “과학은 하나의 과정이며, 세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이다. (…) 과학은 어떠한 역경을 만나든지 자아에 매몰되지 않고 경이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과학은 ‘성취’가 아니라 ‘태도’이며, 이 태도의 핵심에는 호기심이 있다고 짚는다. 그러면서 이 호기심이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지에 대해 쓴다. “호기심은 우리의 신경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열게 하며, 내면에서 우리를 갉아먹는 스트레스 호르몬에 제동을 건다. 과학적 태도의 기반인 호기심은 그 자체로 우리를 치유하는 약이다.” 지은이는 이를 입증하는 연구도 소개한다. “도파민은 (익히 알려진) 보상에서도 오지만, 답을 찾을지 모르는 기대감에서 더 강하게 온다.”(‘기적을 부르는 뇌’·노먼 도이지)

다이애나는 과학적 투병 생활을 이어간다. 가끔은 지은이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면서도, 매일 남극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뇌종양 자선 마라톤 행사에서 지은이를 비롯한 모든 참가자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비범했던 것처럼 종양도 비범했고, 안면마비와 경련, 언어장애 등이 찾아온다. 엄마의 변화를 지켜보던 딸은 아빠에게 묻는다. “엄마가 나한테서 종양이 옮은 거예요?” 아이의 물음 속에서 지은이는 과학의 힘과 역할을 재확인한다. 숱한 ‘상관관계’ 속에서 ‘인과관계’를 섬세하게 발라내는 것. 그럼으로써 “두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 함께 고통을 겪게 된대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고통을 유발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그는 암세포를 지닌 채 살아가는 아이와 남았다. 아이는 한차례 더 뇌수술을 받았다. 연이은 투병과 사별로 지은이의 마음은 전소 직전까지 갔지만, 폐허가 잉태한 경이를 자연에서 무수히 목격한 그는 끝내 과학을 믿기로 결심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은 전부 재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범람한 강물과 함께 땅에 내려앉은 화산재는 광물질을 풍부히 남겨 생명체가 자라날 환경을 만든다.” “(애벌레는) 찐득하게 녹아내렸다가 완전히 다른 동물이 된다.” 이제 과학은 업의 테두리를 벗어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자 신앙이 된다. “과학은 영적인 자기 구원의 실천이 될 수 있다.”

원제는 ‘This ordinary stardust’. 제목에 쓰인 ‘우주 먼지’라는 표현은 한국적 쓰임과는 의미가 약간 다르다. 한국에서는 ‘우주 먼지 같은 존재’라는 관용구로, ‘미물’로서의 인간(유한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지만, 지은이는 반대로 인간의 영원성을 설명하기 위해 썼다. 우주의 먼지로부터 생명이 탄생했고, 각 고유한 생명은 이 먼지를 한동안 품었다가 도로 내보내며 어떻게든 지구에 흔적을 남기기에 한 사람의 삶은 인류의 과거-미래와 이어진다는 것이다. 과학의 렌즈로 비출 때, 상실은 상실이 아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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