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볼티모어 - 바이오테크 시대를 연 "르네상스형 과학자" [김선영의 K-바이오 인사이트]

2025. 11. 27.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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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새로운 '먹거리 산업'으로 거론되지만, 불확실성도 여전한 한국 바이오 산업. 바이오 분야 '1호 교수 창업자'이자, 지난 27년간 글로벌 수준의 과제에서 성패와 영욕을 경험한 김선영 교수가 우리 산업 생태계의 이슈와 문제점을 진단하고 세계 진출 방안을 모색한다.
역전사효소 발견으로 노벨상 수상
연구, 행정, 정책을 넘나든 역량
현대 '과학 리더십'의 전형적 모범
데이비드 볼티모어. 김선영 교수 제공

지난 9월, "20세기 생명과학에서 가장 극적인 발견 중 하나"로 평가되는 역전사효소를 규명한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을 제시한 뒤, 크릭은 유전정보가 DNA에서 RNA를 거쳐 단백질의 일방향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며 이를 ‘분자생물학의 중심교리(central dogma)’라 명명했다. 이후 이 개념을 소개한 왓슨의 저서가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면서 오랫동안 생명과학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70년 테민과 볼티모어가 역전사효소를 발견해 RNA가 DNA를 만들 수 있음이 드러나면서, 도그마는 흔들렸고 생명과학의 기본 틀도 재정립될 수밖에 없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역전사효소는 산업적으로도 중요했다. RNA를 주형으로 cDNA를 합성하는 이 효소는 재조합 DNA 기술에 연결되며 인체 유용 단백질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 1980년대 거대한 바이오 의약 산업의 서막을 여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볼티모어는 37세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다수의 과학자가 수상 후 연구에서 멀어지며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과 달리 그는 이후에도 주요 발견을 이어갔다. 실험과 이론은 물론 행정, 정책, 산업까지 넘나들며 탁월한 성취를 남긴 그를 ‘르네상스형 과학자’라 부르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의 지적 기반에는 실험심리학자였던 어머니 거트루드(Gertrude Lipschitz)의 영향이 컸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과학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 어머니 덕분이라 회상했다. 어린 시절 길러진 비판적 사고와 지적 독립성은 그의 과학적 태도를 형성한 중요한 자양분이었다.

1960년대 바이러스는 생명현상을 해독하는 주요 모델이었다. 볼티모어는 폴리오바이러스 연구를 통해 RNA 바이러스 복제 메커니즘, 감염 후 세포질에서 중합효소가 생성되는 과정, 하나의 긴 단백질이 기능이 다른 여러개의 작은 단백질로 잘라지는 원리를 규명했다. 그의 노벨상 수상 강연은 폴리오바이러스에서 레트로바이러스로 이어지는 과학적 여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1964년 28세에 록펠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솔크 (Salk) 연구소를 거쳐 3년 후 MIT 교수가 된다. 솔크로 그를 영입한 사람은 후일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는 레나토 둘베코(Renato Dulbecco)였고, MIT로 올 것을 권한 이는 1969년 수상자인 살바도르 루리아(Salvador Luria)였다. 루리아는 3주 전(2025년 11월 6일) 세상을 떠난 제임스 왓슨의 박사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1982년 그는 MIT와 함께 화이트헤드 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을 맡았다. 젊은 연구자를 과감히 영입해 지원했고, 이 시기 에릭 랜더, 피터 킴, 루스 레만 등 훗날 생명과학을 이끄는 인물들이 그의 손을 거쳐 성장했다. 화이트헤드 시절 그는 NF-κB, BCR-ABL 융합 단백질, RAG1/2 등을 발견했다. 면역, 염증, 암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유전자이다. 이를 지켜본 필자는 "그가 노벨상을 또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도가 큰 업적이었다.

그의 경력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이마니시-카리 교수의 논문 조작 의혹이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되면서, 논문의 주요 작성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명세 탓에 집중 공격을 받았다. 강압적 스타일로 악명 높았던 존 딩겔 (John Dingell) 미 하원의원은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볼티모어를 집요하게 몰아붙였고, 연이어 열린 청문회는 과학 내부의 문제를 전국적 정치 이슈로 비화시켰다.

그는 1990년 록펠러 대학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 소동 속에 그는 취임 18개월 만에 총장직을 내려 놓아야 했다. 그러나 1996년 이마니시-카리가 공식적으로 무혐의 판정을 받으며 그의 명예도 회복됐다. 이 사건은 과학적 논쟁이 정치적 프레임에 포획될 때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남았다. 이런 시련과 모욕적 상황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생산적 활동을 이어간 그의 내공과 역량에는 절로 감탄이 나온다.

MIT로 돌아온 후 그의 연구는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 NF-κB와 RAG 연구는 심화되었고 HIV 연구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냈다. 그에 대한 학계의 신뢰는 오히려 높아졌다.

1997년, 이공계의 최고 명문인 칼텍(Caltech)은 그를 총장으로 초빙했다. 그는 2006년까지 생명과학 인프라 확충, 대규모 기금 조성, 젊은 연구자 영입으로 대학을 재정비했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험실을 유지하며 면역공학 프로그램을 구축했고, 마이크로 RNA, 면역, 염증 연구를 이어갔다. 그의 연구실은 2019년 무렵 문을 닫으니 그의 나이 81세였다.

볼티모어는 바이오테크 산업의 태동기에도 중심에 있었다. 재조합 DNA 기술의 등장으로 사회적 우려가 커지자 그는 1975년 아실로마 회의를 주도해 생물안전 가이드라인을 마련했고 이는 NIH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바이오 산업은 사회적 신뢰 속에 출발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엔 바이오 기업들을 도우면서 ‘분자 백만장자’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휴먼게놈프로젝트 (HGP) 추진 계획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일었다. 이 과정에서 볼티모어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소규모 실험실 중심으로 이뤄지던 생명과학 연구의 예산이 거대 프로젝트인 HGP로 빨려 들어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이른바 “Small Science vs. Big Science” 논쟁이다.

볼티모어는 초기에 HGP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시퀀싱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이 초대형 프로젝트가 오히려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 판단해 점차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

필자가 지난 33년간 우리 과학계에서 일하며 가장 아쉽게 느낀 점은 리더십의 부재였다. 뛰어난 개인들로 구성된 과학계에서 존경과 신뢰를 얻기는 쉽지 않다. 깊은 과학적 통찰, 탁월한 업적, 인재를 발굴·육성하는 능력, 다양한 의견을 포용하는 소통력, 자금 확보 능력 중 최소 세 가지는 갖추어야 리더가 될 수 있다. 볼티모어는 이 모든 덕목을 갖춘 드문 인물이었다.

지금 한국 과학기술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바이오 분야는 특히 그렇다. AI의 급속한 발전은 국가 간 격차를 더욱 벌리고, 바이오는 이제 대규모 인프라와 학제 간 융합 역량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기초와 응용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구시대에 만들어진 전공 분야 단위의 학과·단과대학 간 이기주의로 적지 않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정부 역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과 예산의 우선순위가 흔들리니, 10년을 내다보는 중장기 전략 수립은 여전히 요원하다.

급격한 기술·산업 변화 속에서 우리 과학계를 이끌 혜안의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언젠가 볼티모어와 같은 지도자가 등장해 K-바이오의 새로운 도약을 열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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