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라는 도시의 틈, 역사 바꾼 윤봉길의 결단 - 해외편 <5>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16)]

유혜연 2025. 11. 26. 19:1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세기초 조계지 공존한 국제도시
임정, 투쟁·외교 병행 최적 장소 판단
일제 기념식에 폭탄… 세계에 타전
국제 사회 목도하도록 설계된 메시지
中 국민당, 독립운동 지원 계기로

“제 시계는 6원, 선생님 시계는 2원입니다. 저는 1시간밖에 없으니 바꿉시다”
윤봉길·김구 기념사진. 의거 직전 촬영된 사진으로, 결의에 찬 듯 이미 마음을 굳힌 표정의 윤봉길과 굳은 표정의 김구가 대비된다. /AI 복원 사진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여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열강의 조계지가 공존하는 국제도시라는 특성은 중국 영토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감시망을 교란할 여지를 남겼다. 서양 언론인·외교관이 드나드는 환경은 조선 독립운동의 존재를 세계에 노출시킬 수 있는 효과적 창구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본거지로 선택한 배경엔 ‘투쟁과 외교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도시’라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그 격랑의 중심에서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의거가 일어났다. 국제도시 중심부에서 열린 일본군 기념식이 폭탄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의 자기 과시를 정면으로 붕괴시켰고,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조선 독립운동의 실체를 각인시켰다. 윤봉길 의거 직후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 지원하기로 했다.

1932년 4월의 상하이를 윤봉길이라는 한 개인의 용기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조계지 체제, 임시정부의 전략, 국제 여론의 가능성,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의 균열까지…. 그날의 의거는 도시가 만든 조건과 한 청년의 결단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지난 9월 상하이 현장을 따라 윤봉길이 남긴 질문과 세계가 목격한 흔적들을 좇았다.

■ 독립운동이 숨 쉴 수 있었던 공간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전 머물렀던 ‘김해산 거주지’가 위치한 주택가. 현재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의거 당일 아침 김구·김해산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시계를 맞바꾼 뒤 바로 이곳을 걸어나와 홍커우공원으로 향했던 장소다. 2025.9.9 상하이/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1930년대 상하이는 항일 행동이 연속적으로 분출되던 도시였다. 육삼정 의거, 황포탄 의거 등 수많은 행동이 조계지라는 보호막 안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고 존재를 드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검열과 체포를 피하면서도 외교관·언론·교포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확산할 수 있는, 그 시대에 거의 유일한 무대였다.1 그 정점에서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가 일어났고, 상하이라는 도시가 가진 특성은 그의 선택을 세계가 목격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봉길은 ‘쇼와 일왕 탄생·상하이 전승 기념식’이 동시에 열린 홍커우공원 단상에 폭탄을 투척했다. 상하이 파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고 한 달 뒤인 5월26일 사망했으며,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와 육군 중장 우에다 겐키치 등 일본 고위 군·외교 인사들이 치명상을 입었다. 한 번의 폭발로 식민 권력의 대대적인 행사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국제사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2

의거 후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일본군은 조계지 문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며 대대적인 색출 작전에 나섰고, 상하이 곳곳에서 교포 사회에 대한 검열과 폭력이 강화됐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 과시 행사가 폭탄 한 발로 무너진 장면을 똑똑히 바라봤다. 현장에 있던 서양 기자들은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중국 국민당은 그때까지의 방관적 태도를 바꿔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중국 공산당 역시 항일전선의 동반자로 임시정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상하이라는 도시의 틀을 이용한 의거는 조계지 밖으로 확산됐다.

장제스는 사건 직후 “중국의 수십만 대군과 4억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평가하며 윤봉길 의거의 의미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를 계기로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와 조선의열단을 항일전선의 핵심 파트너로 인정하며 군사 자금 등을 지원했다. 1932년 10월부터 이뤄진 김원봉 중심의 조선의열단에 대한 후원 등이 대표적이다.3

이런 흐름으로 보면 상하이는 단순한 ‘피신처’가 아니라 통신망과 국제 여론을 활용해 투쟁·외교·선전을 동시에 펼칠 수 있는 도시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과 세계의 시선이 겹쳐 있는 이 공간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읽히고 어떤 효과를 가져야 하는지까지 치열하게 계산하며 움직였다. 윤봉길 의거는 개인의 영웅담을 넘어, 당시 무장투쟁이 세계를 향해 어떻게 발산되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 골목 깊숙이 윤봉길의 마지막 거처

상하이 원창리 골목에 남아 있는 ‘김해산 거주지’ 표지판.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 의거 전날과 당일 아침 김구 선생과 식사를 했던 장소로 알려진 집 외벽에 붙어있다. 2025.9.9 상하이/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거사 직전 김구와 시계 교환한 곳
‘김해산 거주지’ 표지, 일부 당시 모습
이름 바뀐 의거 장소 현재 루쉰공원
루쉰·페퇴피·윤봉길 ‘저항’ 상징 공간
기념관엔 한글·중국어 포스트잇 가득

취재팀은 윤봉길의 마지막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황푸구 원창리 일대를 찾았다. 현지에는 ‘김해산(金海山) 거주지’라는 표지판이 벽에 붙어 있었다. 이곳은 홍커우공원 의거 전날과 당일 아침, 윤봉길이 김구·김해산과 함께 식사를 한 장소다. 건물은 외벽 보수 흔적이 있지만 구조와 출입 계단은 당시 형태가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윤봉길은 거사 당일 이 집을 나서며 자신의 시계를 풀어 김구 선생의 시계와 맞바꿨다. “제 시계는 6원이고 선생님 시계는 2원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으니 제 것과 바꿉시다”라는 말도 함께 전해진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여기에서 끝나고, 이제 그 시간이 김구에게 이어져야 한다는 뜻을 암묵적으로 남긴 행위로 읽힌다. 돌아올 수 없음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시계를 교환하는 마지막 장면은 의거의 실행이 죽음을 예감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루쉰공원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전시된 윤 의사가 의거 당일 사용한 도시락 폭탄과 김구 선생과 맞바꾼 시계 복제본. 2025.9.9 상하이/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이런 역사적 장소가 뒤늦게 표지판을 갖게 된 데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다. 중국의 일반 주거지 골목 한복판에 있어 오랫동안 어떠한 표식도 붙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020년 당시 고교생이던 박준용(현 서울대 역사학부 재학)씨가 상하이 독립유적을 조사하던 중 이 집의 의미를 확인하고, 소속 동아리 ‘대한민국 청소년 외교단’과 함께 건물주, 중국 공무원 등을 설득해 명패를 설치했다고 한다.

■ ‘폭탄의 자리’ 해석이 겹쳐진 장소

상하이 루쉰공원(옛 홍커우공원) 내 위치한 윤봉길 의사 기념관. 2025.9.9 상하이/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김해산 거주지에서 택시로 20분가량 이동하면 루쉰공원(옛 홍커우공원)에 닿는다. 평일 오후에도 산책하는 시민과 관광객이 많은 평온한 풍경이지만,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루쉰공원은 윤봉길 의거 기념 공간을 중심으로 세 개의 상징이 한 구역 안에 배치돼 있다.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루쉰의 동상, 헝가리 민족시인 페퇴피 샨도르의 흉상, 그리고 윤봉길을 기리는 기념 공간이다. 나라와 언어는 다르지만 사상과 식민지 경험, 권력 비판, 저항이라는 공통된 맥락이 있는 인물들이 한 공간에 놓여 있다.

상하이 루쉰공원(옛 홍커우공원) 윤봉길 의사 기념관 내부. 윤봉길 의사의 흉상 앞에 시민들이 남긴 꽃과 메모들이 놓여 있다. 2025.9.9 상하이/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공원 안쪽에 자리한 윤봉길 기념관 내부는 이 공간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흉상 아래에는 한국어·중국어 등으로 적힌 포스트잇 쪽지가 켜켜이 붙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항일 영웅’ ‘평화를 지킨 사람’ ‘기억하겠습니다’.

윤봉길이 의거를 준비했던 주요 길들을 따라 걷다 보니 널리 알려진 윤봉길과 김구의 마지막 사진이 새롭게 다가왔다. 사진 속 윤봉길은 결의에 찬 듯 이미 마음을 굳힌 표정이지만 김구의 표정은 굳어 있다. 기념 촬영처럼 보이나 실제 상황을 떠올리면 표정의 온도차는 분명하다. 윤봉길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을 이미 받아들였고, 김구는 그 선택이 불러올 외교적 파장과 임시정부의 앞날을 함께 짊어져야 했다.4 같은 자리에서 찍힌 두 얼굴은 서로 다른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 도시가 만든 가능성과 개인의 결단

루쉰공원 내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을 기리는 표석. 2025.9.9 상하이/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체포된 윤, 연말 총살후 암장 당해
‘해방후 어떤 세계 꿈꿨나’ 질문 남겨

결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체포돼 상하이 일본 해군 법무감부에서 재판을 거친 뒤 총살형을 당했다.

당시 군법회의 죄목은 ‘폭탄 사용에 의한 일본군 장성과 군민 살상’으로 요약된다. 1932년 5월25일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1월18일 일본 기선 ‘다이요마루’로 호송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된 뒤 같은 해 12월18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육군형무소로 이감됐고, 다음 날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오전 7시27분 미간을 향한 총탄으로 쓰러졌으며 13분 후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5일제는 의도적으로 그의 시신을 노다야마 공동묘지로 향하는 계단 아래에 암장해 방문객이 무심코 밟고 지나가도록 만들었다.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프랑스 조계지는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경찰의 체포 활동에는 반드시 프랑스 조계당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제의 주요 요인들이 사망·부상당하면서 일본 측에서 터져나오는 강한 항의를 프랑스 정부도 무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는 당시 의거가 상하이 사변 관련 송호정전협정 조인식 예정일(4월30일) 하루 전에 발생한 데 영향을 받은 것인데, 프랑스는 당시 상하이에 거액을 투자한 상황이라 이곳에서 중일 간 전쟁이 다시 발발하는 걸 원치 않았다.6

한때 은신이 가능하면서도 세계의 이목을 향해 발신할 수 있던 도시, 각국 외교관과 기자들이 집결해 있던 조계지 체제, 국제 여론을 활용할 여지가 존재했던 공간. 상하이라는 도시가 만들 수 있었던 조건 위에 한 개인의 결단이 더해졌을 때 그렇게 의거는 현실이 됐다.

결국 윤봉길의 폭탄은 일제를 향한 단순한 공격을 넘어 식민지였던 약소국 조선의 상황을 국제사회가 목도하도록 설계된 메시지였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영웅 서사’를 강조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시작에 있다. “그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본 ‘해방 이후의 세계’는 무엇이었는가.”

다음 편에서는 그 물음의 답을 찾는다. 임시정부 청사 터, 헌법 초안 논의가 진행된 공간, 그리고 이명필 흥사단 상해지부장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임시정부가 세우고자 했던 해방 이후 민주주의 국가의 가치와 방향을 따라간다.

1) 김명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상해 프랑스 조계에 수립되었나, 국제정치논총 제58집 4호, 2018, 188~207쪽 2) 김상기, 尹奉吉의 金澤에서의 순국과 순국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1집, 2012, 367~371쪽 3) 배경한, 윤봉길 의거 이후 蔣介石·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長期抗戰, 역사학보 제236집, 2017, 375~378쪽 4) 김희곤, 윤봉길 현양 자료를 통해 본 상해 의거의 역사적 의미,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3집, 2012, 244~249쪽 5) 김상기, 371~382쪽 6) 장세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1919~1932),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8집, 2019, 71~76쪽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상하이/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Copyright © 경인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