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만평 ‘안마봉’] ‘두 손’ 든 대한민국 청년의 절망

황승경 예술학 박사·문화칼럼니스트 2025. 11. 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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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 만평 ‘안마봉’은 과거 ‘신동아’와 ‘동아일보’에 실린 만평(동아로 보는 ‘카툰 100년’)에서 영감을 얻어 같은 그림체로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한 만평입니다.

ⓒ정승혜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30대가 33만4000명이다. 사상 최대다. 

국가데이터처가 11월 12일 발표한 '10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10월만 해도 '그냥 쉬었다'고 답한 30대는 16만 명에 못 미쳤는데 17년 만에 배 이상 급증했다. 

왕성한 경제활동으로 우리 사회의 생산·소비의 핵심 역할은 하는 30대가 일터를 떠나고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와 기성세대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이곳저곳을 돌며 불안정한 비정규직 생활을 하다가 고용시장에서 조기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 국내 소비는 줄고, 양극화는 심화되고, 결혼과 출산도 줄어든다. 그런데도 중소기업은 인력난을 호소하며 외국인노동자를 찾아 나선다. '그냥 쉬는' 30대의 문제는 결국 국가적 문제인 것이다.  

물가도 가혹하다. 10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2.4% 올라 1년 3개월 만에 가장 높다. 사과(21.6%), 쌀값(21.3%), 고등어(11%), 돼지고기(6.1%) 등 먹을거리가 많이 올랐다. 

고단한 몸을 누일 집은 어떤가. 10월 서울 아파트 월세는 전년 동월 대비 9.8% 급등했다. 통계 집계가 시작된 2016년 이후 가장 큰 폭이다. 각종 부동산 대책으로 대출은 어렵고, 서울의 전세는 급감했다. 2021년 43%이던 월세 비중은 63%로 뛰었다. 소비 중 주거비 지출 비율이 자가·전세 8.5%, 월세 21.5%라고 하니 월세 비중이 높은 2030에게는 주거비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전세를 레버리지 삼아 내 집 마련을 하려는 청년들의 '주거 사다리'도 흔들린다. 

청년들은 "이번 생은 끝났다"며 '빚투(빚내서 투자)'를 하고, 허망한 '캄보디아 드림'을 꿈꾼다. 청년을 두 손 두 발 들게 하는 이 슬픈 자화상은 누가 그린 것인가. 청년 때부터 자산 양극화를 체험하는 이 구조적 문제를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동아로 보는 '카툰 100년'

1932년
‘두 손' 든 대한민국 청년의 환호

<김은배 군 6착 입상> - ‘신동아’ 1932년 10월호
1932년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만평에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이 포착돼 있다. 결승선을 향해 뛰어드는 그의 가슴에는 일장기 대신 오륜기가 달렸고, 관중의 환호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조차 모호하다. 그림 아래 적힌 '김은배 6위 입상'이라는 짧은 문장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적 무게는 크다.

1932년 LA올림픽 마라톤에서 김은배(1912~1983)는 세계 6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가 출발선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성적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 조선은 독자적으로 올림픽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제국의 위신에 도움이 될 때만 문이 열렸고, 조선인의 활약이 민족적 자긍심으로 번질 가능성이 보이면 곧 닫혔다.

마라톤은 특히 통제가 심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벌어진 이른바 '가나쿠리 시조(金栗四三) 사건'(일본 선수 가나쿠리 시조가 경기 중 일사병으로 탈진해 근처 농가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해 '경기 중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사건)으로 '실종 소동'으로 보도되면서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남겼다. 일본은 이후 마라톤 종목을 더욱 엄격히 관리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조선인이 대표 선수로 뛴 건 제국 내부의 정치적·상징적 결정이었다.

김은배는 생업을 병행하며 홀로 몸을 만들었다. 전문 코치도, 체계적 훈련도 없었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여비는 민간 모금과 지역의 도움에 의존했다. 그의 성취는 결핍을 돌파한 한 인간의 궤적이었다.

당시 총독부의 체력 증진 정책은 군국주의적 신체 훈련에 불과했다. 그러나 YMCA, 학교 체육회, 신문사 주최 대회 등을 중심으로 민간의 자생적 움직임이 일었다. 김은배의 노력은 그 새로운 운동의 결실이었다.

김은배의 6위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1위 손기정과 3위 남승룡으로 이어질 서사의 서곡이었다. 그의 질주는 조선인들에게 "우리도 세계와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만평 아래의 한 줄, '6위 입상'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내디딘 식민지 청년의 선언이었다.

황승경 예술학 박사·문화칼럼니스트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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