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언론 감시 피하는 ‘청와궁’ 되지 말아야
기자들은 또 구석에 ‘격리’되나
대통령 출퇴근 취재 허용돼야
‘제왕적 대통령’의 길 막는다

일본 언론의 세밀한 취재에 경의를 표한 적이 있다.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2020년 8월 13일. 오전 취재를 마치고 다케바시(竹橋)의 조선일보 지국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민영방송 TBS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걸음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베의 건강 이상설이 연일 회자되던 때였다.
TBS는 아베가 총리 관저(총리 집무 공간) 현관에서 로비를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기까지 걸린 시간이 계속 늘고 있다고 전했다. 2020년 4월 평균 18.24초 걸렸으나 이후 19.10초(5월)→19.14초(6월)→19.62초(7월)로 점점 길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8월 들어서는 20.83초를 기록했다고 했다.
일본 기자들이 매일 스톱워치로 아베의 걸음을 측정하고 기사를 쓴 데 대해 경탄하며 서울의 편집국에 보고했다. 지면을 확보한 후, 신속하게 기사를 써 국제면에 보도했다. TBS의 이 기사는 아베의 건강 이상설 관련 보도에서 화룡점정 역할을 했다. 아베는 이 뉴스가 나온 지 보름 만인 8월 28일 건강을 이유로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이런 일이 일본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TBS 기자들의 기사 착상도 남달랐지만, 일본 총리 관저가 언론의 감시를 전제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특파원 시절 외신 기자증을 받고 총리 관저에 가보니, 총리는 5층에, 기자실은 1층에 있었다. 기자들은 현관이 있는 3층 로비까지 자유롭게 출입한다. 각 언론사 말진 기자들은 하루 종일 로비에서 진을 치고 관저에 드나드는 이들을 관찰한다. 국민을 대신해 묻고, 기록한다. 총리가 누구를 만나는지가 분(分) 단위로 다음 날 알려지는 것은 이런 시스템 덕분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대통령 근접 취재가 잠시 가능했던 때가 있었다. 2022년 5월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약식 회견을 시작했다. 임기 초반 그가 출근길에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방문 중 비속어 논란 이후 특정 방송사와의 갈등이 격화됐고, 대통령실 내부에서도 ‘출근길 회견 무용론’이 제기됐다. 불과 반년 만인 2022년 11월 중단됐다.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자폭(自爆) 계엄이 잉태되기 시작한 지점은 바로 이때가 아닐까. 언론을 귀찮아하고, 기자들 질문에 귀를 닫으면서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재명 대통령이 이르면 다음 달 용산 대통령실을 청와대로 이전하려는 계획에 걱정이 앞선다. 개방 기간 동안 청와대를 관람한 사람은 누구나 체감했듯이 청와대는 본질적으로 열린 업무 공간이 아니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설계가 궁궐을 연상시킨다. 기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동쪽 구석의 춘추관뿐이다. 사실상 ‘격리’된다. 청와대가 아니라 ‘청와궁(靑瓦宮)’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대통령이 언론의 감시에서 벗어나 안락함에 취하기 쉬운 구조다. 오죽했으면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며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했겠나.
이 대통령이 언론의 실시간 견제 장치 없이 청와대로 복귀하면, 그렇지 않아도 무소불위인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 속성이 더 공고해질 위험성이 커 보인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청와대 내부 취재를 일부 허용하고, 대통령이 출퇴근할 때만이라도 기자들이 취재할 수 있어야 한다. 청와대가 민심과 동떨어진 ‘청와궁’이 되는 것은 순식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정동영 “北과 언제 어디서든 대화할 준비 되어 있어”
- ‘서해 사건’ 항소 포기하나... 정성호 “전형적 보복 수사”
- 장원영 “홍콩은 좋아하는 나라” 발언에 中 네티즌 “주권 모독” 반발
- 부산서 WKBL 올스타전...팬투표 1위 이이지마 등 출동
- 의사 인력 추계위 참석 위원들 “추계 타당성 부족해”
- “이건 군대가 아니다” 말기 암환자도 최전방에, 뇌물 강요·살해·학대는 일상
- [오늘의 운세] 1월 3일 토요일 (음력 11월 15일 丁丑)
- 연차 이틀이면 9일 쉰다...2026년 ‘황금연휴’ 언제 오나
- 업스테이지, ‘중국 모델 복사’ 의혹 정면 반박...“솔라는 완전히 새로운 모델”
- 제주공항 이륙 앞둔 진에어 여객기에서 연기가?… 122명 대피 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