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 많고 살 게 없다” 물가·관세 이중고… 美 연말 대목 ‘충동구매’ 줄어
1인당 지출 예정액은 감소
사라진 핫딜, 깐깐해진 소비자
“소비 여력 있지만, 심리 위축”
미국 최대 쇼핑 시즌에 해당하는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됐지만, 현장 분위기가 예전과 사뭇 다르다. 쇼핑몰을 찾는 발길은 붐비는데, 정작 물건을 사서 나오는 소비자는 드물다. 강력한 관세 정책이 소비재 가격 상승을 부추긴 데다, 여전히 높은 물가까지 맞물리면서 소비 심리를 짓누른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유통업체들은 이윤을 챙기기 위해 할인 폭을 줄였다. 이 가격에 만족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은 ‘이름 난 행사에 살 만한 물건이 없다’며 지갑을 닫고 있다.

24일(현지시각) 로이터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올해 추수감사절 연휴 쇼핑객은 사상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전미소매협회(NRF)는 추수감사절부터 그 다음주 월요일 사이버 먼데이(Cyber Monday)까지 이어지는 5일간 쇼핑객 수가 1억 869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지난해 1억 8340만 명보다 약 350만 명 늘어난 수치다.
외형은 커졌지만 내실은 쪼그라들었다. NRF는 올해 1인당 평균 선물 및 계절상품 지출액이 890달러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902달러보다 1.3% 줄었다. 전체 연말 쇼핑 시즌(11~12월) 매출 규모는 사상 처음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보이지만, 성장률은 3.7~4.2% 수준에 머물며 지난해 성장률(4.8%)을 밑돌 것으로 예측됐다.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는 주된 이유로 고물가 피로감과 경기 불확실성 두 가지를 꼽았다. 뉴욕의 한 소비자는 로이터에 “블랙프라이데이 할인 상품 대부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꼭 필요한 특정 상품 할인만 노려서 구매할 계획”이라며 “지난해 선물 구입에 500달러를 썼지만, 올해는 예산을 300달러로 대폭 줄였다”고 전했다.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 할인율도 낮아졌다. 유통업체들은 수익성 악화를 우려해 과거처럼 파격적인 미끼 상품(doorbuster deal) 수를 줄였다. 소비자 정보 사이트 컨슈머 월드 에드가 드워스키 대표는 “올해는 언제 물건을 사는 게 가장 저렴할지 판단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컨슈머 월드에 따르면 과거 콜스(Kohl’s), JC페니(JC Penney), 메이시스(Macy’s) 같은 미국 주요 서민형 백화점들은 이 무렵이면 쿠폰과 리베이트를 결합해 소형 주방가전을 5달러 수준에 팔았다. 남은 재고를 처분하고, 연말 매출을 높이려는 경영 전략이다. 올해는 이런 할인이 대부분 사라졌다. 콜스는 올해 토스터, 믹서기 등을 평년보다 2배 비싼 9.99달러에 판매하면서 리베이트 혜택을 없애고 15% 할인 쿠폰만 제공하기로 했다.
브랜드 컨설팅 업체 컨슈머 컬렉티브의 제시카 라미레즈 대표는 “올해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프로모션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11월 초 반짝 할인이 있긴 했지만 할인 폭이 크지 않았고, 지금은 정가 판매 비중이 훨씬 높다”고 했다. 그녀는 “간혹 나오는 할인도 특정 기간에만 잠깐 진행하는 일회성 프로모션이라 소비자가 혜택을 체감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비자들은 더 신중해졌다. NRF 설문조사에 따르면 소비자 3명 중 2명꼴인 약 66%가 “충분히 기다렸다가 물건을 사겠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59%보다 높아진 수치로, 전문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려는 심리가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올해 블랙프라이데이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올해 모든 수입품에 대한 기본 10% 관세를 발효한 이후 처음 맞이하는 행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수입품에 대한 고관세 부과를 예고하거나 실행했다. 로이터는 전문가를 인용해 “관세 타격을 입은 소매업체들이 가격을 인상하거나 할인 폭을 줄이면서 소비자들이 예전만한 특가를 찾기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유통업체들은 관세 인상에 따른 비용 부담을 소비자 가격에 전가하거나,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는 결국 할인 실종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행정부 관세 정책은 기업 공급망에도 불확실성을 더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의류, 가전, 장난감 등 인기가 많은 주요 연말 선물들은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짧아진 쇼핑 기간도 악재였다. 미국 연방법으로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네 번째 목요일로 정해져 있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11월 27일로 21~23일 무렵이었던 예년보다 늦은 편이다.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지는 연말 쇼핑 시즌이 엿새 정도 줄었다. 통상 이 연말 쇼핑 시즌은 유통업체 연간 이익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요한 시기다. 월마트와 아마존 등 대형 유통업체들은 이 점을 감안해 예년보다 일찍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월마트는 이달 11일부터 세 단계에 걸쳐 조기 할인을 시작했다. 아마존도 예년과 비슷한 21일부터 블랙프라이데이 주간 행사에 돌입했다. 하지만 반짝 효과에 그칠 뿐, 전반적인 소비 침체 흐름을 되돌리긴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금융권에서는 현재 미국 소비 시장을 ‘돈 쓸 여력은 남아있지만, 소비에 의욕이 없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데이터에 따르면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미국 가계 예금 잔고는 팬데믹 이전 2019년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저축한 돈을 헐어서 쓸 만큼 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크 매튜스 NR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가계 대차대조표는 여전히 건전하다”면서도 “문제는 소비 심리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소비자들은 펀더멘털(기초 체력) 측면에서 문제가 없지만, 감정적으로 위축돼 있어 지출을 꺼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비는 미국 경제 70%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소비 위축이 장기화하면 기업 실적 악화와 고용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향후 경기 전망을 어둡게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준비한 경기 부양책들이 실제 가계 소득 증대로 이어지기까지는 시차가 존재한다. 당분간 고물가와 고금리, 관세 리스크라는 3중고 속에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쉽게 열지 않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월마트 등 일부 대형 유통업체는 공격적인 가격 인하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월마트는 정가 678달러짜리 85인치 TCL 로쿠 TV를 498달러에 내놓는 등 파격적인 미끼 상품을 일부 선보였다. 그러나 이는 자금력이 풍부한 일부 대기업에 국한된 전략에 그친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대다수 소매업체는 생존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형국이다.
NRF는 올해 블랙프라이데이가 소비 양극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북적이는 인파 뒤로,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물건을 내려놓는 팍팍한 미국 서민 경제 현실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이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르포] ‘3000원 한강버스’ 뜬다… 출퇴근 ‘대안’ 부상
- [단독] 40년 넘은 K2 소총, 신형으로… 軍, 2028년 목표 ‘한국형 소총-Ⅱ’ 사업 추진
- 증권사 RIA 유치 경쟁 과열에… 체리피커 주의보
- 서울 아파트 관악·성북 3% 뛰고, 강남은 0%대… ‘15억 이하’ 실수요자 몰려
- 삼성전기, AI 반도체 기판 증설 가속… 2년 연속 1조원대 집중 투자
- 이란과 협상 와중에도… 美 항공모함·전투기 잇따라 중동 배치
- 현대차·기아, 美 1분기 신기록… 하이브리드 판매량 53% 급증
- ‘미확정’ 공시 23번에 R&D 축소…삼천당제약, 신뢰 논란 속 고발 대응
- “文 정부 실패했는데”… 빈 상가·오피스를 주택으로 공급 ‘글쎄’
- [르포] 단 2㎜의 오차도 허용 않는 고숙련 인력 포진… 효성重 초고압 변압기 생산 현장 가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