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요구 받아 적은 항복 문서… 美, 75년 유럽 안보 질서 훼손”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5. 11. 2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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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우크라 평화안에 비판 거세
왼쪽부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 AFP=연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3년 9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전쟁을 끝내겠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28조(條) 평화안’ 이후 거센 후폭풍이 불고 있다. 이 구상은 우크라이나가 동부 돈바스 전역 등 러시아 점령지 대부분을 내주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포기하며, 병력을 현재의 절반 수준인 60만명으로 제한하는 등 러시아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국제사회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평화안이 ‘힘에 의한 영토 탈취’를 인정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질서를 무력화하고,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보상하는 ‘항복 문서’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 일이 선례가 되면 세계 곳곳에서 영토·민족 문제로 인한 무력 분쟁이 잇따를 것이란 우려와 함께, 평화안 초안을 러시아가 작성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보상, 인류 양심 모욕”

유럽의회와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헝가리 등 20국 의회 의원 47명은 23일 공개 서한에서 “침략국 러시아에 대한 회유나 보상,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 시도는 국제법과 도덕 모두 용납할 수 없다”며 “이는 인류 양심에 대한 모욕”이라고 규탄했다.

이들은 냉전 시절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대(對)소련 구호였던 “우리가 이기고, 그들은 진다(We win, they lose)”를 인용하며 “러시아에 굴복하면 자유 세계의 가치를 잃고 혼돈과 무질서로 빠지게 된다”고 했다. 트럼프가 여러 차례 존경심을 드러냈던 레이건의 구호를 빌려 트럼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들은 “대만 등 권위주의 정권의 위협을 받는 국가들이 추가 공격에 노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도 르몽드 인터뷰에서 “이 안은 트럼프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으로,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의미한다”면서 “지난 75년간 유지돼 온 유럽 안보 질서와 미·유럽 동맹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서 “이는 유럽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며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언젠간 우리 역시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선 평화안이 러시아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 키스 켈로그의 딸인 미건 몹스 미국안전안보연구소(CASS) 소장은 “평화안의 ‘러시아는 이웃 국가를 침공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같은 문장은 러시아 관료식 표현”이라며 “초안이 러시아어로 먼저 작성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무소속 앵거스 킹, 공화당 마이크 라운즈 상원 의원 등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이 문서를 ‘러시아의 희망사항(wish list)’이라고 불렀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 초안을 그대로 받아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러시아의 잔혹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의 이익에 재앙적”이라고 했다.

美·우크라 “평화 구상안 마련”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마코 루비오(오른쪽) 미국 국무 장관과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이 종전안에 대한 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美·우크라 “평화 프레임워크 마련”

유럽연합(EU)과 영국·독일·프랑스 등은 미국과 우크라이나에 제시할 수정안을 마련 중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유럽 측은 ‘돈바스 포기’ 조항을 거부하고 현재 전선을 기준으로 휴전 후 영토 교환 협상을 시작하며, 우크라이나군 규모를 80만명으로 상향하는 등 초안보다 대폭 완화된 조건을 준비하고 있다.

“추수감사절(27일)까지 합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우크라이나를 압박했던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우리의 노력에 고마움을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며 재차 불만을 제기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X에 “우크라이나의 생명을 구해준 미국의 지원과 모든 미국인,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께 개인적으로 감사드린다”는 글을 올렸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평화안의 세부 내용을 논의했다. 양국은 공동 성명을 통해 “수정되고 정제된(updated and refined) 평화 프레임워크(틀) 초안을 마련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요구가 최종안에 어떻게, 얼마나 반영될지 주목된다. 젤렌스키는 지난 20일 트럼프 평화안을 전달받은 뒤 “우크라이나의 존엄성과 미국의 지지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내용”이라며 “미국에 대안들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젤렌스키는 이르면 이번 주 미국을 방문, 트럼프를 직접 만나 설득하는 방안도 협의 중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엔 트럼프 평화안을 사실상의 ‘항복’으로 보는 인식이 압도적”이라며 “가뜩이나 측근의 부패 스캔들로 흔들리는 젤렌스키 입장에선 수용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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