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김윤관 2025. 11. 24. 20:0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 삶이 빚어낸 한뼘 들판이 다닥다닥 빛난다
남해군 남면 가천리. 길은 어느 순간 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고, 바람은 점점 바다 내음을 짙게 풍긴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에는 믿기 어려운 풍광이 펼쳐진다. 산자락을 따라 층층이 쌓인 계단식 논, 그 아래로는 끝없이 이어진 남해 바다가 맞닿아 있다. 108층, 400여 구획에 이르는 다랭이논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다. 초록 물결로 빛나는 거대한 풍경화이자 선조들이 삶을 일구어낸 살아 있는 예술품이다.

문화재청은 이 독창적 농업경관의 가치를 인정해 2009년 가천 다랭이마을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5호로 지정했다. 미국 CNN 방송 역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소개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남해 가천다랭이마을(봄 유채꽃) 전경.


◇척박한 섬 땅, 삶의 지혜로 빚은 계단식 논

남해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넓은 평야는 찾기 어렵고, 절벽과 가파른 산비탈만이 이어져 있었다. 주민들은 척박한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땅을 깎고 돌을 쌓아 다랭이논을 만들었다. 바닷바람에 흙이 쓸려 내려가도 버틸 수 있도록 석축을 견고히 세우고, 빗물을 모아 논으로 흘려보냈다.

다랭이논의 돌담은 대부분 바다와 수직을 이루는 90도 각도로 세워져 있다. 한 뼘이라도 더 넓은 농지를 확보하려는 간절함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만들었고, 이 곡선은 다시 푸른 남해바다와 어우러져 독창적인 한국 농촌미학을 완성했다.

가천마을에는 '삿갓논' 전설이 전해진다. 작은 다랭이논을 세던 농부가 어느 날 빠진 한 논을 찾지 못해 허둥대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삿갓을 들어보니 그 안에 작은 논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그만큼 한 뼘의 땅도 귀히 여기며 살아온 선조들의 삶을 잘 보여준다.
 
가천다랭이 마늘논에서 마늘쫑을 뽑고 있다.


과거 가천마을은 어항을 만들기 힘든 지형 탓에 주민 대부분이 다랭이논에 의존했다. 바닷가에 살면서도 농사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민 김모(78) 씨는 "바위틈마다 돌을 채워 논두렁을 쌓고, 작은 물길 하나까지 아껴가며 농사를 지었다"며 "한 뼘의 땅이 곧 생명줄이었다"고 회상했다.

오늘날에는 관광객 증가로 농사만으로는 부족했던 소득을 보완하게 됐다. 민박과 특산물 판매, 농업체험이 새로운 수입원이 되고 있다. 주민 박모(65) 씨는 "관광객이 늘면서 생활에 숨통이 트였다"며 "다만 무분별한 출입으로 논이 훼손되지 않도록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해 가천다랭이마을 모내기 축제장에서 외국인들이 써래질을 체험하고 있다.


◇바다와 맞닿은 예술적 경관

가천 다랭이마을의 매력은 농업사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응봉산과 설흘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 아래, 45~70도의 경사면에 층층의 논이 이어지고, 그 끝에는 남해의 쪽빛 바다가 펼쳐진다. 붉게 물드는 저녁 노을이 계단식 논의 곡선과 맞물릴 때면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이 연출된다.

사계절마다 다른 풍경은 다랭이마을의 백미다. 봄이면 유채꽃과 벚꽃이 화사하게 논둑을 물들이고, 여름에는 푸른 모가 바람에 흔들리며 초록의 파도를 만든다.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석축 위에 내려앉아 또 다른 풍경을 그린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다랭이논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풍경화다.

마을 풍경도 정겹다. 가천마을은 현대적 계획 마을과 달리 집들이 자연 지형에 의지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이 서면 그 뒤로 길이 생기고, 골목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따라 났다. 안개 낀 새벽, 모내기를 위해 논으로 향하는 농부들의 모습은 마치 수십 년 전 농촌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남해 가천다랭이마을 모내기 전경.
가천다랭이마을 모내기


◇보존과 활용, 그리고 희망

남해군은 다랭이마을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경관 유지 보조금 지원 △친환경 농법 장려 △마을 해설사 운영 △체험형 관광 프로그램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주민들이 주도하는 돌담 보수, 농기구 전시, 전통 농업 체험도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관광객 증가로 인한 농지 훼손과 생활 쓰레기 문제가 지적되지만, 주민과 행정, 전문가들은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등재 추진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어 국제적으로도 보존과 활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주민들의 인식 변화다. 예전에는 '힘겨운 삶의 흔적'으로만 여겼던 다랭이논이 이제는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자산이라는 자부심으로 바뀌고 있다. 마을 청년들은 농사 체험 해설사로 나서고, 일부 주민들은 다랭이논을 배경으로 한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하면서 마을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랭이마을은 살아 있는 농업경관이자 국제적으로도 드문 문화경관"이라며 "지속적인 농사와 체계적 관광 관리가 병행된다면 세계적 명소로 도약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수백 년 이어온 인간과 자연의 협력, 생존을 향한 치열한 지혜, 그리고 그 속에서 꽃피운 한국적 정서가 담긴 삶의 터전이다. 계단식 논 하나하나에는 선조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고, 오늘의 주민들은 그것을 지켜내며 살아간다.

관광객은 그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장면은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지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은 경남의 보물이자, 대한민국이 함께 지켜야 할 국가대표 문화경관이다.

김윤관기자 kyk@gnnews.co.kr 사진=남해군 제공

 
남해 가천다랭이마을(봄 유채꽃) 전경.
남해 가천다랭이마을 전경.
남해 가천다랭이마을 논에 마늘을 재배하고 멀칭작업을 하고 있다.


 

Copyright © 경남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