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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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 사후 환관 조고가 승상 이사와 음모를 꾸며 태자를 죽게 하고 우둔한 호해 왕자를 황제로 올린 뒤 자신이 승상이 돼 권력을 농단하면서 진나라 멸망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느날 조고는 조정에 사슴 한 마리를 가져와 말을 대령했다고 말했다.
호해는 비록 우둔했지만 말과 사슴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호해가 보기에 분명 사슴인데 어찌 말이라고 하냐며 신하들을 둘러보면서 동의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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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황제 곁에서 허리를 굽신대며 궁궐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환관들을 흔히 보기 때문에 그들을 매우 미약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나름대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존재였다.
조고는 본래 조(趙)나라의 왕족 출신이었으나 어머니가 진나라에서 형벌을 받는 바람에 형제들이 모두 궁형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는 본디 영리하고 일솜씨가 있고 법률에 능통했기 때문에 시황제가 궁궐에 들여 관직을 주고 막내 왕자 호해의 스승으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옥새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겼다.
조고의 음모 덕에 황제에 오른 호해는 위협이 될 만한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이사와 조고에게 정치를 맡긴채 사치와 향락에 물들어 세월을 보냈다. 조고는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며 승상 이사까지 모함해 죽이고 권력을 잡게 되자 승상의 지위까지 넘보았다.

누가 보아도 분명한 사실에 그 자리에서는 조고도 반박하지 못했지만 이때 호해의 편을 든 신하가 누구인지를 눈으로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하나 둘씩 처단해 버렸다. 이 일화가 바로 사슴을 가리켜서 말이라고 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다.
어째서 조고는 조정에 굳이 사슴을 가지고 갔던 것일까? 그것은 사슴이 왕권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들판에서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중원축록(中原逐鹿)이라는 말은 여러 세력이 제왕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형상을 일컫는다. 신라 국왕들이 쓰던 황금 금관이 사슴의 뿔과 나무를 본뜬 장식을 한 것에서도 사슴이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슴을 가리켜 개나 고양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말이라고 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때 말을 타고 국경을 넘나들며 중국을 위협하던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혐오심정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호해를 황제가 아닌 북방의 오랑캐처럼 하찮게 보고 있다는 것을 지록위마를 통해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어에서 상대방을 '멍청한 놈'이라고 비난할 때 흔히 '빠가야로'라고 하는데 그 한자가 말과 사슴이라는 '빠가(馬鹿, ばか)'와 '놈, 녀석'이라는 뜻 '야로우(野郞, やろう)'를 조합해 만든 것이다. 이것은 호해가 말과 사슴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었다는 것을 빗댄 것으로 역사 이야기를 응용해 지은 꽤나 고상한 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안시(西安市) 안탑구(雁塔區) 곡강지(曲江池) 남로(南路)에 있는 호해의 능원 마당에는 지록위마를 재현해 놓은 조형물이 있다. 권력자의 권력 농단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거듭 일깨우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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