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한국사회 탈출구일까, 신자유주의적 민족말살정책 도구일까[소설, 한국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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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에서 브래드 로프 캠퍼스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14시간 비행,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4시간 경유, 한 시간 반 연결편 비행 시간, 그리고 버몬트주 버링턴 공항에서 미들버리 대학교의 브래드 로프 캠퍼스까지 약 한 시간 반-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의 거리를 합하면 거의 24시간이 걸린다고 보면 된다.
브래드 로프 캠퍼스는 한때 바다 바닥이었지만 기나긴 시간 전, 육지로 솟아올라 납작한 산을 이룸으로써 참가자들 간 "브래드 로프에서 보자" 대신 "산에서 보자"(see you on the mountain)가 인사로 통용된다.
아니면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민족말살정책의 한 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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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생활


인천국제공항에서 브래드 로프 캠퍼스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14시간 비행,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4시간 경유, 한 시간 반 연결편 비행 시간, 그리고 버몬트주 버링턴 공항에서 미들버리 대학교의 브래드 로프 캠퍼스까지 약 한 시간 반-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의 거리를 합하면 거의 24시간이 걸린다고 보면 된다.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번역가가 미국으로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어떻게든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속국의 사신인 양 제국의 본거지를 밟으며 영어라는 황제에게 얼굴을 보여야 한다.
브래드 로프 캠퍼스는 한때 바다 바닥이었지만 기나긴 시간 전, 육지로 솟아올라 납작한 산을 이룸으로써 참가자들 간 “브래드 로프에서 보자” 대신 “산에서 보자”(see you on the mountain)가 인사로 통용된다. 부정관사 a mountain이 아니라 정관사 the mountain이라고 함으로써 아무 산이 아닌 브래드 로프 캠퍼스를 지칭한다. 아름다운 녹지대이며 건물들은 미국 평야 사극에 나오는 듯한 노란색 19세기 풍 집들의 느슨한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까운 미들버리 대학교에 소속된 캠퍼스지만 나는 브래드 로프에 세 번 참여하면서 한 번도 미들버리 대학교 본 캠퍼스에 발을 디딘 적이 없을 정도로 브래드 로프는 자기만의 세상을 이룬다.
브래드 로프 캠퍼스에는 참여자 전원이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을 먹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여기서 “미국 음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요리하기 쉬우면서 애매한 정체성의 음식으로 식판을 채우고 ‘키다리 아저씨’에서 나올 듯한 홀에서 긴 식탁에 앉아서 먹는다. 전형적인 작은 미국 대학의 분위기로 대화 소리가 굉장히 시끄럽다.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을 축하해.”
식판을 식탁에 내려놓자 안면 있는 어느 남미 출신 스페인어 번역가가 말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친구이지만 같은 처지의 속국 사신으로서 일단 친한 척은 해둔다.
“고마워. 내가 탄 것도 아니지만 한강만이 아닌 한국 전체에 주는 상이라고 우기고 싶어.”
“일은 더 들어오니?”
“그 전에도 일은 많이 들어왔어.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무엇의 시초가 아니라 그 절정이야.”
“그래, 너네 나라가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
“투자를 좀 해야지. 우린 너네 언어와는 달리 기나긴 제국주의적 역사를 가진 언어의 덕을 볼 수 없거든.”
눈치가 아주 없지 않은 이 친구는 말을 아낀다.

아침을 먹고 첫 워크숍으로 간다. 9명의 워크숍 참가자들의 얼굴이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나를 바라본다. 원래 10명이어야 하나 참가자 한 명의 나라가 전쟁에 돌입한 관계로 미국행 비행기를 놓쳤다. 브래드 로프 번역가 대회 폐막 단 하루 만에 미국이 그 나라를 폭격한다. 제국은 그런 곳이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문학에 흠뻑 빠져 있는 동안 제국의 또 다른 속국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민간인 대학살을 진행한다.
“안녕하세요. 저에 대해서 잘 아시기 때문에 제 워크숍에 지원했다는 것을 믿고 일단 제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더 궁금해하는 건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 워크숍을 진행할 것인지겠죠. 여러분 중 한국 출신 번역가가 없기 때문에 한국의 번역 교육에 대해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국의 번역 교육은 보통 전문 번역가가 아닌 교수나 강사가 남의 번역을 헐뜯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공허한 우월감에 만취하며 자신이 번역을 배웠다고 착각하고 이런 수업 방식을 재생산하며 번역은 안 하고 번역 강의만 하는, 비정상적인 번역가가 됩니다. 저는 이런 주입식, 오지선다형 수업 방식으로 워크숍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그럴 거라면 그냥 서울에서 편하게 동영상 강의를 녹화했겠죠. 하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여러분이 찾는 답이 없습니다. 저는 워크숍 멤버들이 여러분 속에 있는 답을 끌어내기 위해 도울 뿐입니다. 따라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무엇이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으로만 보지 마시고 번역문의 어느 부분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대화로 이끌어주는지에 초점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자, 일단 서로 소개부터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오른쪽부터 시작할까요?”
한국인이 번역가가 될 거라면 왜 영한이 아닌 한영 번역가가 되었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나에게 영어는 단순히 언어가 아니었다. 자유 그 자체였다. 영어를 구사하는 순간, 제인 오스틴 소설을 읽으며 그 언어에 함몰되는 순간, 나는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사람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는 주입식 교육, 체벌, 징병제, 단일 민족 등 일상화된 폭력과 징그러울 정도로 획일적인 생활방식을 의미했다. 한국어는 공부, 공부, 시험, 시험, 군대, 구직, 취직, 과로, 해고, 고립, 죽음의 서술을 의미했고, 영어는 제인 오스틴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리버럴 아츠, 그리고 소설로 가득한 도서관과 서점을 의미했다. 어렸을 때 런던의 채링 크로스 로드에 있는 포일즈라는 대형 서점과 사랑에 빠졌고-사랑에 빠졌다는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다-그날 이후로 인생을 책에 바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어떤 형태로든, 작가로든 편집자로든 교수로든 인쇄소 직원으로든, 한평생 책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 수녀가 되겠다, 신부가 되겠다는 다짐과 마찬가지의 영적인 울림이 있는 다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의미 있다.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문학은 존재하기에. “문학은 우리의 신앙을 대신하고 우리의 신앙 역시 신앙을 대신한다.” 시인 T S 엘리엇 왈. 졸업 후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문학 번역이라는 일을 알게 되었다. 문학 번역이 아니었어도 책과 관련 있는 일이었다면 당연히 그 일을 했었다. 그것이 문학이라는 신앙의 힘이었다. 아니, 신앙을 대신하는, 그리고 신앙을 대신하는 신앙도 대신하는, 문학. 남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하냐, 번역가가 되느냐고 묻는다. 쓸데없는 질문이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신의 힘을 설명할 수 없다.

The barn(역시 정관사). 이곳은 정말 말 그대로 농장의 창고처럼 생겼다. 이곳에서 대형 강연을 하기도 하지만 브래드 로프 캠퍼스에서 유일하게 술을 파는 곳이기도 하고 저녁마다 참가자들이 펼치는 낭독회 이후 친목 도모용 자리이자 네트워킹용 사교 행사가 이어진다. 나는 the barn에서 출판인 참여자에게 몇 권의 책을 팔았는지 모른다.
예의상 누군가가 노벨상 얘기를 꺼낸다. 노벨상은 책을 잘 읽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나 화제가 되는 일이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의미 있는 상은 아니다. 한강 작가 본인에게도 기쁨보다 피곤함을 더 안겨준 듯하다. 번역 문학에 실제로 종사하는 각 속국의 사신들조차 중에서도 작년에 누가 노벨상을 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그날 저녁의 가장 인상적인 대화 주제는 반딧불이었다. “정말 근사했어요. 어제 도로 건너 들판에서 반딧불이 깔려 있는 걸 봤어요. 홍콩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요.” 영어는 홍콩을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의 언어이지만, 오늘날 광둥어를 구사하는 홍콩 사람들은 만다린을 구사하는 중국 대륙과 갈등한다. 홍콩 문학 번역가에게 영어는 식민화의 도구일까,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자유의 문일까. 나 자신에게도 자문할 수 있다. 영어는 억압적인 한국 사회로부터의 탈출구일까. 아니면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민족말살정책의 한 도구일까. 한국에서는 반딧불을 시골에서 볼 수 있지만 역시 쉽게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홍콩 번역가는 오늘 밤 꼭 들판에 가보라고 당부한다.
브래드 로프에 세 번 와봤지만 가끔 반딧불이 지나가는 것만 봤을 뿐, 그날 밤 들판 위로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 깜빡거리는 광경은 처음이다.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다. 한때 나에게는 이것이 영어이고, 이것이 문학이었다. 성적, 입시, 취업의 도구 따위가 아닌, 반딧불로 가득한 이국의 여름 밤하늘. 혼자 있음에도 단 한 순간 혼자가 아닌 존재로 만들어주는 이것. 이것이 영어이고, 문학이었다. 조선시대 사신들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손끝, 혀끝에 닿을 만한 자유, 하지만 나의 느린 손놀림으로부터 달아나는 자유. 밤은 깊어지고 나는 여전히 들판에 떠오르는 언어의 광경을 바라본다.

■ 작가의 말
‘영어 생활’ 속 화자는 누가 보아도 번역가 안톤 허와 겹쳐진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국가 출신으로 한국문학을 번역하고 있는 주인공. 연일 해외 일정을 소화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까지도 마찬가지다. 차이점이 있다면 허 작가에게는 노벨상 수상 당시의 구체적인 기억이 있다.
그는 “발표 당시 부커상 심사위원 첫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며 “런던에 있는 다른 심사위원들이 어수선해지더니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탔다고 말해줬다. 그해 심사위원장이었던 맥스 포터가 마침 ‘채식주의자’ 영문 번역의 편집자여서 다들 우리 둘을 축하해줬다”고 전했다.
“이야기의 요구에 따라 제 개인적인 경험을 사용했지만 소설은 결국 소설임을 강조하고 싶어요.”
한영 번역가인 그에겐 ‘영어’를 둘러싼 복합적인 감각이 있다. 허 작가는 “영어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아파트를 샀다”면서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억압하는 세력이 사용하는 언어이자 팔레스타인인들이 학살에 대해 세계로 호소하는 언어 또한 영어”라고 설명했다. 문학이 신앙을 대신한다면 번역과 소설 집필은 무엇일까. 허 작가는 말했다. “사이비 종교? 집단 사기? 모든 종교는 사이비, 사기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작가로서 저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허 작가는 영어로 번역한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올해 부커상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올해 첫 장편소설 ‘영원을 향하여’를 출간했다.
신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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