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통령도 지시했는데 공정위원장은 “금산 분리 완화 안 돼”

정부가 AI(인공지능)와 반도체 등 첨단 산업 투자를 위해 금산 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금산 분리 완화는 최후의 수단”이라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주 위원장은 “금산 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려면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도 했다.
금산 분리 완화 논의는 이재명 대통령이 물꼬를 텄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 “독점의 폐해가 없다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범위 내에서 금산 분리 등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동석한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도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엄중한 환경 속에서 규제를 무조건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선(善)은 아니다”라고 했다. 공정위원장 혼자 대통령·부총리와 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빅테크의 기술력과 금융권의 자본력을 결합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손잡고 1000억달러(약 147조원) 펀드를 조성해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구글과 아마존도 사모펀드·자산운용사와 합작해 수백억 달러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40년 넘게 묵은 금산 분리 규제에 손발이 묶여 있다. 현행법은 지주회사가 금융사를 보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미국처럼 빅테크와 금융사가 대규모 합작 법인(JV)을 만들어 투자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다. 또 SK하이닉스와 LG에너지솔루션 같은 지주회사의 손자 회사들은 자회사(증손 회사)를 만들 때 100% 자기 자본으로 설립해야 한다. 미국에 자회사 형태로 공장을 짓고 싶어도 외부 자금을 투자받을 수 없다. 이런 불합리한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에 대해 공정위원장은 “일부 사안, 몇 개 회사의 민원 때문에 규제를 바꿀 수는 없다”며 “(재계의) 민원성 논의가 주를 이루는 것 같아 불만”이라고 했다.
AI 시대의 경쟁은 자본력과 속도의 싸움이다. 데이터센터 하나 짓는 데 수조 원이 드는 현실에서 한국 기업들만 외부 자금 없이 자기 돈으로 투자하라는 것은 모래주머니 달고 100m 달리기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첨단 산업 투자를 위한 금산 분리 완화는 일부 기업의 민원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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