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사진집 이야기 <93> 신티아 토르토사 산티스테반 '논과 주변 풍경을 담은 영상 시리즈의 스크린 숏'] 하루 일부를 관찰로 보내는 일, 꾸준히 기록하는 일

서점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도서를 주문해야 할 때, 출판사 홈페이지를 자주 살펴본다. 낯선 이름의 작가를 발견하게 되면, 작가에 대한 정보도 검색해 본다. 보통은 작가 홈페이지가 찾아지고 작가의 다른 작업이나 인터뷰, 보도 자료 등이 검색된다.
그런데 신티아 토르토사 산티스테반(Cin-tia Tortosa Santisteban)이라는 이름을 검색하자, 검색에 걸리는 게 너무 없었다. 출판사 홈페이지 그리고 이 책이 입고돼 있는 서점 사이트 몇 군데가 검색될 뿐이었다. ‘이상하네’라고 내심 생각했다.
나중에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전해 듣고는 그제야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 출판사 쇼즈 코뮌(Chose Commune)의 대표이자, 편집자 세실 푸앵보프 코이즈미(Cecile Poimboeuf-Koizumi)는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 뜬 흥미로운 이미지를 보게 됐다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한 일본 시골 풍경이었는데, 보도를 걷는 아이들이나 논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과 같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일관된 각도로 촬영된 저해상도 이미지는 오히려 편집자의 눈길을 끌었다. 사진에는 ‘논과 주변 풍경을 담은 영상 시리즈의 스크린 숏’이라는 텍스트만 적혀 있었다.

스페인 출신인 산티스테반은 그라나다대와 아일랜드 골웨이대에서 영문학·언어학· 교육학을 전공하고, 현재 일본 가나가와현에 거주하며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사진이나 예술 분야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2019년부터 시각예술에 관심을 두게 된 작가는 일상 풍경을 관찰하며 사진과 영상을 찍어왔다.
작은 일본식 아파트에 거주하던 작가가 2021년부터 가장 꾸준히 매진한 작업은 5층에 있는 자기 집 발코니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영상을 찍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캡처한 스크린 숏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편집자가 보게 된 건 바로 이 스크린 숏이었다. 편집자는 이들 이미지에 매력을 느껴 산티스테반에게 연락했고, 오랜 책 작업 끝에 비로소 이들 이미지가 책으로 나왔다.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알게 되자, 작가 이름을 검색했을 때 별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산티스테반은 이전에 전시나 책 출판 같은 활동을 전혀 한 적이 없었다. ‘논과 주변 풍경을 담은 영상 시리즈의 스크린 숏’에는 1000편이 넘는 영상에서 엄선해 캡처한 스크린 숏 107장이 수록돼 있다. 벼가 익은 논을 연상하게 하는 색상과 질감의 커버, 그리고 디지털 화면에서 마주칠 법한 폰트를 통해 이 책은 표지에서 먼저 책에 담긴 세계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고고화화질질 속 속에에서서 돋 돋보보이이는는 흐흐릿릿함함의의 미미학학
스크린 숏 아래로는 논이 펼쳐져 있고, 어린이, 자전거 타는 사람, 농부, 차량 등이 오가는 소소한 순간들이 펼쳐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절이 바뀌고, 햇빛 방향이 달라지며, 농부의 몸짓이나 아이들의 옷차림이 변한다. 작가는 화려한 사건보다는 덧없을 수 있는 매일의 지나가는 풍경을 변화하는 계절과 색깔로 보여준다. 하루하루의 미세한 차이가 겹치며 시간 그리고 인생이라는 거대한 층위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작가는 말한다. “매일 영상을 찍는다. 의식처럼. 아래 논밭의 풍경이 변해가는 색, 계절, 사람들의 통행, 같은 장소라도 매 순간이 다르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했기 때문에 작가와 대상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다. 이들 이미지만 보여주었다면 책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을 텐데, 그 대신 때때로 시점이 바뀌어 근접한 거리에서 촬영한 사물이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외부 세계를 관찰하기 위해 서 있던 지점인 발코니 내부에서 촬영한 사물이다. 널어둔 빨래나 화분의 이미지가 곳곳에 있어 책에 지루하지 않은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미지의 주된 미학적 특징은 흐릿함이다. 멀리서 관찰한 일상의 흐름을 영상으로 담고 이를 캡처했기 때문에, 책 속 이미지는 선명하기보다 흐릿하고 질감이 거칠다. 그런데 이는 이미지의 결함이라 느껴지기보다 고화질 이미지의 풍요 속에 사는 우리 눈에 오히려 어떤 매력으로 다가온다. 렌즈의 광학적 도움 없이 먼 대상을 선명하게 볼 수 없기에, 이 흐릿함은 우선 우리가 먼 대상을 바라보는 실제 경험과 더 닮아 있다. 그리고 어딘가 해진 듯한 느낌은 흐릿하게 희미해지는 기억이나 덧없이 지나가는 순간을 닮아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인공지능(AI)이 하이퍼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시대지만, 모든 작업에 그러한 선명함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이 책은 보여준다.
하루의 일부를 관찰로 보내는 일, 그것을 꾸준히 기록하는 일 그리고 그 기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 이 책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세상을 성실히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물이다. 작고 소박한 아이디어가 책으로 섬세하게 구현됐을 때, 거기에는 단단한 완결성이 존재한다. 이 책은 과도한 미사여구나 지적인 허세 없이 명료한 아이디어를 명확히 구현했을 때의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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