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도 러닝 크루처럼"… 20년간 책 모임 500개 꾸린 독서광의 서재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독서 모임 하다 보니, 화가 줄었대요."
독서 모임 신봉자 김민영(50)씨의 얘기다. 김씨는 함께 읽는 매력에 빠져 20년째 독서 모임을 꾸리고 있다. 그가 만든 독서 모임 수만 500개가 넘는다.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이사도 맡고 있다. 최근에는 독서 모임의 효용을 알리기 위해 '내 삶을 위한 독서 모임'을 출간했다. 책 1,000여 권이 빼곡한 경기 용인시 그의 자택 서재를 찾아 함께 읽기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40대에 독서 모임에 발 들인 동생의 사례를 들었다. "혼자라면 절대 안 읽을 책을 읽고, 토론하고, 다른 생각도 적극적으로 하는 이들과 만나니 자꾸 이해심이 커지고, 공감받으니 화도 풀리더라"는 거다. 이어지는 설명. "독서 모임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거든요. 평소 '왜 그렇게 해, 그게 아니지, 그건 이렇게 하는 게 나아' 이런 말만 듣다가 자신의 생각이 부정당하지 않고,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존중받는 경험을 계속하다 보면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지더라고요."
함께 읽자! '내 삶을 위한' 독서 모임

김씨도 처음엔 혼자 읽었다. 대학 시절 전공(응용통계학)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그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탐독했다. 우연히 펼친 장정일의 '독서 일기'는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는 "나도 저렇게 평생 책을 읽고, 읽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열정적으로 품게 됐다"고 했다.
대학 졸업반이 됐을 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이력서 600장을 쓰고 대우증권에 입사했다. 일을 하면서도 읽고 쓰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매주 화요일 퇴근 후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을 찾았다. 4년 반 동안 기초반부터 창작반까지 수료한 뒤 퇴사하고 방송작가로, 온라인 매체의 출판 담당 기자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읽는 게 재미없고, 너무 비슷한 책만 읽고 있다"고 깨닫고는 블로그에 글 하나를 올렸다. "함께 책 읽을 분 계신가요?"
인생 첫 독서 모임의 시작이었다. 매번 '기승전진화론'을 외치던 '과학 덕후'부터 제인 오스틴 타령만 하던 영미문학 전공자까지 개성 뚜렷한 6명이 모였다. 김씨는 "아직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독서 모임을 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며 "각자 방식대로 고집하는 독서 분야가 있고, 그게 서로 부딪혀 스파크를 내면 이렇게 재미있구나 느낀 뒤로는 책 모임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문학에만 치우쳤던 그의 독서 영역도 함께 읽은 후 크게 넓어졌다. "독서는 나와 작가가 소통하는 행위이기도 해요. 작가의 말에 내 생각을 보태 대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연습이 필요하죠. 거기 그치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도 반드시 들어봐야 합니다." 그는 "나도 모르게 평생 쌓아왔던 고집이나 독선에서 벗어나 유연해지기 위해 독서는 생명수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낭독·전작·비대면… 함께 읽기의 힘
김씨는 2008년 숭례문학당에 합류했다. 인문학과 예술을 함께 공부하는 독서공동체다. 동시에 대여섯 개의 독서 모임에도 꾸준히 참여해왔다. "정독 중 정독"인 낭독 모임부터 과학책 읽기, 전작 읽기, 비대면 모임 등 형태도 다양하다.
특히 전작 읽기는 책을 더 깊고 풍부하게 즐기기 위해 그가 강력 추천하는 독서법. "한 창작자를 열심히 탐구하다 보면 그를 둘러싼 세계의 부분과 전체가 동시에 보이면서 독서 내공을 다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부터 서경식, 홍세화, 영국 작가 서머싯 몸까지 인문비평, 사회, 소설 등 전 분야를 아우르는 그만의 목록이 생겼을 정도다.

서머싯 몸을 세계적으로 알린 '달과 6펜스'는 "책 모임에서 100회 이상 토론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다. 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10년 전에 읽고, 지금 다시 읽어도 손색없는 책"이다. 분량이 방대한 데다 미화된 기록이라는 의심 때문에 다소 인기가 없는 평전이나 자서전도 그가 유난히 사랑하는 분야다. 김씨는 "한 인물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와 문화, 철학도 같이 수용할 수 있어서 굉장히 풍성한 책 읽기가 가능하다"고 했다.
한국문학도 그가 오래도록 애정을 쏟아온 분야. 그중에서도 단편소설을 특히 좋아한다. 하성란의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틈날 때마다 주변에 추천하는 작품이다. 그는 "한국 사회 곳곳의 단면을 도려내듯 보여준 명단편들의 향연"이라며 "평단과 문학 애독자들에게는 오래도록 읽혀 왔지만 대중에겐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며 일독을 권했다.
이런 책들을 모아 정리한 '내 인생 100권의 책'을 그는 서가에 가지런히 꽂아두고 있다. 언제든 다시 펼쳐볼 수 있도록.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내 인생 영화 100편'을 꼽은 데서 영감을 받아 2009년 처음 작성한 리스트다. 이후 강지나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김지혜의 '가족각본'처럼 "한국사회의 좌표를 보여주는 책"을 더해왔다.

읽어도 남는 게 없는 것 같다면? "독서 모임!"
"독서 모임은 그 자체로 생각하며 읽기입니다. 모임 전엔 가서 할 말을 생각하고, 모임 중엔 들으면서 말하며 생각하고, 모임 후엔 돌아보며 생각하게 되거든요. 이중, 삼중의 사고 정리와 확장이 일어나요. 차원이 다른 깊이 읽기인 셈이죠."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는 것 같고, 책 내용을 따라가기 급급할수록 독서 모임이 필요한 이유다. 독서 습관이 잡히지 않은 초심자에게도 책 모임을 권한다. 그는 "삶에서 책 읽는 게 우선순위가 되고 습관이 되려면 루틴이 생겨야 하는데 혼자서는 그게 잘 안 된다"며 "러닝 크루처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모임에 소속돼 독서 루틴을 가지면 초보자도 롱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독서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서평 쓰기 같은 독후 활동도 중시한다. "책을 기억하는 유효기간을 늘려주고 읽은 사람의 언어를 재구성해 주고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독서가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했듯 자기 역사를 쓴다"는 점에서다.

독서 모임을 하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집 근처 도서관을 찾아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모임을 참고하거나 사서의 안내를 받을 수도 있다. 동네책방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책 모임 공지를 쉽게 볼 수 있다.
여전히 책 모임이나 독서를 위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이들을 위한 그의 꿀팁. 스마트폰 메인 화면에 '예스24'나 '알라딘' 같은 온라인서점 애플리케이션을 띄워두는 것이다. 그는 "이동 중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대신 온라인서점에 들어가 눈에 띄는 아무 책이나 터치해 '미리보기'로 살펴보라"며 "전자책을 결제하지 않아도 하루 30쪽씩 무료로 읽을 수 있고, 마음에 들면 구매해 완독할 수도 있다"고 했다. 디지털 디톡스가 불가능하다면, 이렇게라도 책과 가까워지는 습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책 읽는 사람을 일컫는 말 중 '간서치'(看書癡·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라는 표현을 가장 싫어한다면서 그는 오늘도 책 모임에 간다. "책은 홀로 읽어도 좋지만, 함께 읽으면 더 좋아집니다. 내 삶을 위한 독서 모임에 어서 오세요."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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