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편든 美 “우크라, 돈바스 전부 넘겨라”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5. 11. 21.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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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종전안 마련, 우크라에 전달
왼쪽부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연합

미국과 러시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새 ‘종전 구상’을 마련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우크라이나 언론들이 19일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전역을 러시아에 넘기고, 우크라이나 군 병력을 절반으로 줄이며, 외국군의 주둔을 금지하는 것이 골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인 스티브 윗코프가 러시아 측과 함께 만들어 트럼프의 재가를 받았고, 최근 우크라이나에 전달됐다고 이 매체들은 전했다. 대부분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으로,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미국과 우크라이나·유럽 간의 갈등이 재점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28항으로 이뤄진 이 구상은 현재 전선을 동결한 상태에서 휴전을 맺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영토 교환’을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동부 도네츠크·루한스크주(州) 전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하되 행정 통제권은 러시아가 갖도록 해 이 지역(돈바스) 전체를 사실상 러시아에 넘긴다. 유럽 최대 원전인 자포리자 원전이 있는 남부 자포리자주와 헤르손주는 추후 협상을 통해 양측의 영토를 정하기로 했다. 이는 점령지 전체를 가져가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영토 변경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이에서 푸틴의 손을 들어준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AP 연합뉴스러 공습에 어린이 등 최소 25명 숨져 19일 우크라이나 서부 테르노필의 한 주택 건물이 러시아의 미사일 공습으로 처참히 파괴됐다. 이날 공습으로 어린이 3명을 포함해 최소 25명이 숨졌다.

새 종전 구상은 또 우크라이나 정규군 병력을 현재(85만~100만명)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등 핵심 무기 체계를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사실상 ‘무장 해제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우크라이나 내 외국군 주둔을 금지하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막는 조항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역시 러시아가 종전 조건으로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것과 부합한다.

우크라이나의 탈(脫)러시아 조치를 복원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구체적으로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의 공용어에 다시 포함하고,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로 재편입하는 등의 내용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2022년 5월 러시아 정교회가 푸틴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자국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했다며 러시아 정교회와 관계를 단절했다. 새 종전 구상에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도 있으나, 구체적 내용이 빠져 있어 우크라이나의 반발과 불안감을 무마하려는 땜질 조항이란 지적이 나온다.

새 종전 구상의 내용이 알려지자 우크라이나와 유럽에선 비판이 쏟아졌다. 젤렌스키는 이날 기자회견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러시아의 침략에 보상을 주는 어떤 평화안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다만 “우리는 모든 파트너와 함께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며 트럼프와의 직접 충돌은 피하려는 의도도 내비쳤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는 20일 “어떤 종전안이든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관여해야 한다”며 유럽이 배제된 것에 반발했다. 장노엘 바로 프랑스 외무 장관도 “평화가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며 새 종전안이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점을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일각에선 “주권을 포기하고 러시아의 종속국으로 남으라는 요구”라며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요새 방어선이 있는 도네츠크 서부를 내주고, 병력 감축과 외국군 주둔 금지까지 수용하라는 것은 러시아군에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는 현지 매체에 “우리가 ‘레드라인’으로 못 박아온 선을 한꺼번에 넘는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측은 표면적으로는 시큰둥한 모습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대통령실) 대변인은 “새로운 진전은 없다”고 했고, 마리아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도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전달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스통신 등 관영 매체들이 새 종전 구상 내용을 상세히 보도해 기정사실화 작업에 나선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트럼프의 종전안 수용 압박은 본격화하고 있다. 댄 드리스컬 미 육군 장관과 랜디 조지 육군참모총장, 크리스 도너휴 미 육군 유럽·아프리카 사령관이 19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도착했다. 미국 국방부는 이번 방문을 “전황 평가를 위한 사실 조사 임무이자 전쟁 종식을 위한 방안 모색”이라고 설명했지만, 워싱턴포스트는 “젤렌스키를 압박하려는 행보”라고 분석했다.

한편 러시아군은 19일 오전 미사일과 드론 500여 기를 동원해 우크라이나 전역을 공습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어린이 3명을 포함해 최소 25명이 숨졌고 영하의 날씨 속에 열병합발전소 등 에너지 시설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비상 정전 조치가 다시 시작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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