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워내고야 말 새싹 [슬기로운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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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때 썼던 일기를 들춰 보다 웃음이 나왔다.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터디카페에 놓인 작은 화분들에 대한 내용이다.
'책상마다 작은 화분들이 있는데 다 시들어서 흙밖에 없다. 혹시 몰라 주말마다 물을 주고 있다.' 두번째 일기.
'화분 1개에서 아주 작은 새싹이 자라났다! 흙 안에 씨앗이 남아 있었나 보다. 물만 줘도 자라나는 게 신기하다.' 세번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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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린 | 젠더팀 기자
스무살 때 썼던 일기를 들춰 보다 웃음이 나왔다.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터디카페에 놓인 작은 화분들에 대한 내용이다. 첫번째 일기. ‘책상마다 작은 화분들이 있는데 다 시들어서 흙밖에 없다. 혹시 몰라 주말마다 물을 주고 있다.’ 두번째 일기. ‘화분 1개에서 아주 작은 새싹이 자라났다! 흙 안에 씨앗이 남아 있었나 보다. 물만 줘도 자라나는 게 신기하다.’ 세번째 일기. ‘새싹이 났던 화분에서 분홍색 꽃이 피었다. 한 것도 없는데 뿌듯하다. 어쩌면 꽃과 사람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꾸준한 관심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생명의 신비함과 나름의 깨달음(?)을 담고 있는 일기를 보니 웃음이 났다. 동시에 기자로 일하며 만난, ‘꽃을 피워내고야 말 새싹’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지난해 11월, 거리의 위기 청소년을 발굴·지원하기 위해 매주 거리 상담을 진행하는 ‘서울시립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의 부스를 찾은 적 있다. ‘나무’는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이름도, 나이도, 가출 여부도 묻지 않았다. 당시 홀로 부스를 찾은 ㄱ(17)양이 “고민을 이야기하러 주말마다 부스를 찾는다. ‘나무’ 활동가들을 만나는 게 삶의 낙”이라고 말하며 지었던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무’는 거리 상담 외에도 카페형 상담 공간과 생활 공간을 마련해, 집에도 쉼터에도 들어갈 수 없는 여성 청소년들에게 그 이름처럼 조건 없이 품을 내어주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나무’가 오는 28일자로 12년 만에 문을 닫는다. 다른 청소년 쉼터와 서비스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서울시의 재위탁을 받지 못했다. ‘나무’의 마지막 인사를 알리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에는 “서울시가 너무 미워요. 처음으로 믿은 기관인데, 정말 잘 이끌어주셨는데…”라는 댓글들이 달렸다.
‘나무’의 마지막을 보며, 최근 가정 밖 청소년의 주거 지원 문제를 취재하다 만난 이하연(가명·17)양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학대로 3년 전 집을 나온 하연은 청소년 쉼터 5곳을 전전하며 지내왔다. 한겨울 서울역에서 잠을 청하던 때도 있었다. 하연은 한 일시 쉼터의 지원을 받아 미술학원에 다니는데, 학원이 밤늦게 끝나 쉼터의 통금 시간을 지킬 수 없다는 이유로 최근 수차례 쉼터 입소를 거절당했다고 한다. 성평등가족부에 직접 민원을 넣은 끝에 하연은 다행히 최근 중장기 쉼터에 입소하게 됐지만, 하연처럼 쉼터 입소를 거절당하거나 쉼터 이용 기간이 끝나 또 다른 쉼터로 옮겨지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적지 않다. 쉼터는 원가정 복귀, 사회 진출을 목표로 하고, 가정 밖 청소년 지원 정책은 ‘쉼터’ 중심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쉼터 밖 청소년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던 ‘나무’까지 사라진다.
하연과 통화하던 중, 목소리에서 설렘이 묻어나던 순간이 있었다. 그는 쉼터 밖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이를 만화로 그리는 ‘애니메이터’를 꿈꾼다고 했다. 홀로 감당하지 못할 고민을 털어내기 위해 ‘나무’를 찾았던 ㄱ양과, 상기된 목소리로 꿈을 말하던 하연에게서 ‘그 화분’들이 겹쳐 보였다. 나를 거부하지 않는 ‘숨 쉴 공간’과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지원들이 이들에겐 물과 햇빛일 터다. 씨앗들을 담지 못하는 작은 화분과 사라지는 화분을 보며, 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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