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에세이] 고인에게 말 걸기- 조평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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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철교 근처 함안 능가사 뒤로 50m 정도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함안차사의 주인공 노아(蘆兒)의 무덤이 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무덤 찾기는 아무런 진척이 없어 포기 상태에 있던 중, 1890년 1월 함안군수 오횡묵이 기록한 '경상도함안군총쇄록'을 읽던 중 그녀의 무덤을 언급한 글이 보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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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철교 근처 함안 능가사 뒤로 50m 정도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함안차사의 주인공 노아(蘆兒)의 무덤이 있다. 필자가 1587년 편집된 ‘함주지’에서 노아에 대한 기록을 읽고, 그녀의 무덤을 찾고자 옛 문헌을 뒤지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벌초가 심리적 중압감이 된다며 무덤을 파 없애는 시대 흐름을 역행하면서까지 나는 한 사람의 무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풍수 사상이 발복과 연결되어 거의 종교화되자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과시하고 더 가지기 위해 넓은 면적에 석물로 장식하자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후손들에게는 벌초가 큰 부담감이 되고 있었다. 부모는 자녀를 낳아 독립할 때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베푼다. 아래로 흐르는 사랑을 먹고 자란 자녀는 사회구성원으로 일하면서 큰 업적과 미담을 남기는 사람과 해악이 더 컸던 사람 등이 생긴다. 편안함만 추구하고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회라면 인간은 죽음과 함께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어 삭막하고 허무하게 될 것이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는 고려말로 추정되고, 젊은 나이에 한시를 잘 지었던 것으로 보아 선비 집 출신으로 보인다. 내가 무덤을 찾고자 한 것은 책 속에 아득히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그녀를 우리 곁 현재의 공간으로 불러오고 싶어서였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무덤 찾기는 아무런 진척이 없어 포기 상태에 있던 중, 1890년 1월 함안군수 오횡묵이 기록한 ‘경상도함안군총쇄록’을 읽던 중 그녀의 무덤을 언급한 글이 보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2009년 가을 용화산 반구정에 은거하던 조성도란 분이 생각나 그를 찾아가서 문의하자, 1936년경 형님에게 들었던 노아의 무덤 위치를 지목해 주었다. 한 사람으로 부족하여 교사 출신 조영제란 분에게 문의하자 같은 장소를 지목했다. 현재 두 분은 고인이 된 지 오래다.
조선 초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에 실망한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피신하자,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으면 인심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다. 마음이 많이 상한 이태조는 아들이 보낸 차사를 죽이기까지 하자, 민가에서 심부름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공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 불렀다.
함안차사(咸安差使)는 함안으로 가는 차사마다 미인에 빠져 업무를 못 보고 돌아오는 경우라, 함흥차사보다 덜 비정하고 낭만적인 면이 있었다. 아들 이방원은 통치를 위해 남의 눈을 의식하여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냈으나, 노아는 딸로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미모와 재능을 무기로 하여 자발적으로 나섰던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노아의 무덤은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어 봉분과 묘역에 아름드리나무가 자라 있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나무를 제거하고 벌초를 한 후, 지역 언론에 원고를 기고하자 함안군청에서 안내문을 세웠다.
노아의 묘는 강바닥에서 높이 치솟은 경양대 기암절벽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운이 좋은 아침이면 붉은 해 기둥과 보름달이 뜨면 월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노아 자신이 영원한 쉼터로 정한 것 같다.
조평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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