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 기다려야 산다”... 日 열도 홀린 ‘사나에 토트’
총리 효과로 주문량 급증
자국 산업 챙기기·실용주의 행보
中 위협·엔저에도 지지율 ‘철옹성’
일본 도쿄 나가타초(永田町) 총리 관저, 오전 8시 20분. 언론 브리핑을 위해 매일 같은 시각 관저 로비로 들어서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64) 일본 총리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 대신, 각 잡힌 검은색 가죽 가방이 들려 있다. 남성 수행비서나 경호원에게 짐을 맡기고 빈손으로 걷던 역대 일본 총리들과 확연히 다른 출근길이다.
다카이치 총리가 든 가방은 에르메스 버킨백이나 샤넬 퀼팅백처럼 유명한 제품이 아니다. 1880년 창업해 일본 왕실에 가죽 제품을 납품해 온 자국 브랜드 ‘하마노(Hamano·濱野) 피혁공예’ 제품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현재 일본 소비 시장을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다. 소셜미디어(SNS)에서는 이 가방을 사나에 토트(Sanae Tote)라고 부르며 구매를 인증하는 게시물이 잇따르고 있다. 해당 제품 정식 명칭은 그레이스 딜라이트 토트(Grace Delight Tote)로 가격은 13만 6400엔(약 127만 원)이다.
뉴욕타임즈(NYT)는 18일(현지시각) 대만 해협을 둘러싼 중국과 갈등 고조, 엔화 가치 약세에 따른 물가 상승 등 대내외 악재가 겹겹이 쌓여 있지만, 여전히 견고한 다카이치 총리 지지율을 언급하면서 그 비결로 직접 들고 다니는 이 국산 가방을 꼽았다. ‘강한 일본’을 내세운 그의 정치적 지향점이 매일 아침마다 대중에게 시각적으로 각인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다카이치 총리 지지율은 11월 현재 도쿄방송 집계 기준 82%를 기록했다. 보편적으로 정치 지도자 지지율은 50%를 넘어서면 ‘높다’고 한다. 60%를 넘으면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제조사 하마노 피혁공예는 본래 사무라이의 칼집을 만들던 기술력을 바탕으로 가죽 산업에 뛰어든 145년 역사 기업이다. 나가노현 가루이자와 인근 미요타마치(御代田町)에 공장을 둔 이 회사는 이미 1980년대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하마노 공식 홈페이지에는 현재 “주문이 폭주해 생산 라인을 풀가동하고 있다”는 긴급 공지가 떠 있다. 지금 주문해도 내년 8월 말이나 되어야 제품을 받을 수 있다.
이 가방은 2030세대 젊은 여성 소비자층, 특히 전문직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그 이유가 ‘실용적 애국주의’와 맞닿아 있다고 전했다. 사나에 토트는 A4 용지 크기 서류가 넉넉히 들어가는 수납공간을 갖췄음에도 무게는 음료수 한병 정도인 700g에 그친다. 나카노 가오리(中野香織) 아오야마가쿠인대 객원교수는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과거 고가 브랜드 제품 소비가 과시용이었다면, 다카이치 총리 가방은 ‘일하는 여성이 쓰는 도구’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며 “노트북과 서류를 직접 들고 다니는 총리 모습이 관리자급 여성들에게 ‘나도 프로페셔널하다’는 자부심을 투영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정치권과 패션 전문가들은 다카이치 총리가 직접 가방을 드는 행위를 고도의 ‘이미지 정치’로 해석한다. 통상 국가 정상, 특히 ‘스트롱맨’을 자처하는 남성 지도자들은 가방을 들지 않는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카멀라 해리스 전 미국 부통령 등 여성 지도자들조차 공식 석상에서 핸드백을 드는 모습은 드물었다. 가방을 드는 행위가 곧 ‘타인을 받들어야 하는 입지’라는 인식이 서구 정치권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 문법을 비틀었다. 바네사 프리드먼 NYT 패션 디렉터는 “권력을 쥔 남성은 서류 가방을 직접 들지 않음으로써 권위를 과시하지만, 다카이치는 이 계산법을 바꿨다”고 했다. 스스로 짐을 드는 모습이 ‘누군가 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특권 의식 대신, 실무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실제 “나 자신에게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은 없다. 내각 전체가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해야 한다”는 발언을 수차례 반복했다. 최근 국회 예산위원회에서는 “요즘 하루 수면 시간이 대체로 2시간부터 길게는 4시간”이라고 직접 밝혔다. 직접 들고 다니는 가방은 이런 철학을 시각적으로 강화하는 장치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총리 지명 전부터 영국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존경한다고 강조했다. 자민당 총재 선거 승리 당시 입었던 짙은 파란색 정장과 진주 목걸이는 대처 전 총리가 자주 하던 스타일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영국 BBC는 다카이치를 두고 ‘일본판 철의 여인(Japan’s Iron Lady)’이라고 했다. 영국 정가에서는 대처가 각료들을 논리로 묵사발 내거나 강하게 질책하는 상황을 두고 ‘핸드백으로 때린다(Handbagging)’고 표현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들고 다니는 하마노 백 역시 강경한 태도를 상징하는 일종의 장비기도 하다.
다만 다카이치 총리는 세세한 부분에서 대처와 차이를 강조했다. 나카노 교수는 “대처 전 총리가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화려한 브로치를 상징처럼 사용했다면, 다카이치 총리는 남성들이 정장에 주로 하는 포켓 스퀘어(행커치프)를 자주 꽂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포켓 스퀘어는 여성성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남성 중심적인 자민당 내에서 상호 신뢰와 동료 의식을 강조하려 방법”이라고 분석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사나에 컷’ 역시 “남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스타일링이라고 총리 전속 미용사 아라이 유키토시는 전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강한 일본’ 이미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남에서도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도쿄 미·일 정상회담 직후 “다카이치 총리 악력이 아주 셌다(Strong handshake)”며 “그는 지혜롭고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는 단순한 덕담이 아니다. 로이터 등 주요 외신은 “다카이치가 추구하는 강경한 이미지가 자민당 내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고, 우익 포퓰리즘 정당 ‘참정당(Sankei-to)’ 등으로 표 이탈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젊은 층과 여성층을 중심으로 다카이치 총리 패션을 따라 하거나 지지를 보내는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13만 엔짜리 국산 가방을 쓰는 검소하고 실용적인 이미지가 국내외 부정적인 이슈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을 낮추는 기제(機制)로 작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트레이츠타임스는 전문가를 인용해 “다카이치 총리는 헤비메탈 음악과 오토바이를 즐기는 의외의 면모가 있다”며 “이런 복합적인 매력이 기성 정치에 실망한 젊은 세대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고 전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관망하던 中, 중동전쟁 적극 개입 선회… 美·이란 갈등 중재자 자처
- ‘담배 한 갑 1만원’ 인상론 솔솔… 학계 “흡연율 낮추려면 검토 필요한 시점”
- [비즈톡톡] “이용자 정체에도 실속 챙기기”… 삼성 10억대 기기에 ‘AI 엔진’ 심은 퍼플렉시티
- 전쟁 전 옮긴 우라늄 노렸나… 美가 이스파한을 때린 이유
- [지금 우리 국회는] “전북에 프로야구 11구단” “대구에 삼성공장”…지방선거 ‘묻지마 공약
- 대주주 2500억 매도 계획 ‘삼천당제약’...하한가에 투자자들 “악몽 떠올라”
- 무섭게 치솟는 원·달러 환율… 해외 가려면 ‘트래블 카드’ 유리
- 황제주 반납한 삼천당제약, ‘주가조작 주장’ 블로거와 전쟁 선포
- 대구 ‘한국관’ 옆에 주상복합을?… 호반그룹, 5년간 방치된 땅 자체 개발
- [르포] 1+1 딱지·PB로 채운 매대... 홈플러스 매장 곳곳 ‘뒤숭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