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원 바라보는 환율, 기업과 개인 엇갈리는 희비

유소연 기자 2025. 11. 20. 15: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고환율에 원자재 수입가 올라 직격탄
서학개미는 평가이익 늘고 환차익 생겨
서울 휘발유 가격이 9개월여 만에 1800원대를 넘어선 18일 오후 서울 시내 주유소에 유가 정보가 표시돼 있다. /뉴스1

“기름값이 너무 올라 주유할 때 손 떨리다가도 두둑해진 미국 주식 잔액을 보면 마음은 든든합니다.” 자칭 ‘서학개미(해외에 투자하는 한국인)’인 직장인 손모(39)씨는 요즘 같은 고환율이 나쁘지 않다. 팬데믹 때 처음 미국 주식 투자를 시작한 손씨는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떨어질 때마다 꾸준히 예수금을 달러로 환전했다. 최근 원화 환율이 뛰면서 그동안 사 모은 미국 주식 평가액이 불었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해외 자산을 달러로 보유한 서학개미들이 조용히 웃고 있다. 고환율이 수입 물가를 올려 가계 부담을 늘리지만 원화로 환산된 해외 자산 평가액 또한 불어나 고환율로 인한 고충이 개인에게선 상쇄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반면 원자재 수입가가 올라 직격탄을 맞은 정유, 항공, 식품 업계 등은 비상이 걸렸다. 글로벌 금융 위기 때와 맞먹는 고환율이지만 그 사이 개인 투자 환경이 달라지며 고환율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개인과 기업 사이에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해외 자산 불어난 개인들

이달 들어 20일까지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평균 1455.9원(오후 3시 30분 기준)을 기록했다. 비상계엄 사태 직후인 올해 1월(1455.5원)을 제외하고는 월 평균 원화 환율이 1450원을 넘긴 건 2009년 3월(1453.35원) 이후 16년여 만이다.

그간 한국인들이 가진 해외 자산은 큰 규모로 불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순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자산에서 대외금융부채를 뺀 것)은 고환율에 따른 환차익 효과 등으로 1조562억달러(약 1552조6000억원)를 기록했다. 2009년 3월 말까지만 해도 순대외금융자산은 -597억달러(약 -87조7500억원)로, 해외에 진 빚이 더 많았다.

그런데 해외 투자 열풍을 타고 지난해 말 1조달러를 처음 넘겼다. 지난 19일 기준 국내 개인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유액만 1524억달러(약 224조원)에 달한다.

자식을 해외에 유학 보낸 부모들의 고환율로 인한 신음 소리도 과거보다 줄었다. 조기 유학 열풍으로 2009년 해외로 나간 유학생 수가 23만명으로 정점에 달했다가 팬데믹 이후 12만명대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해외로 나간 유학·연수 지급액도 2009년 40억달러에 달했지만, 2020년 이후 매년 27억~28억달러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한 유학 업체 관계자는 “예전엔 넉넉하지 않아도 허리띠 졸라매 자녀 조기 유학 비용을 댄 기러기 아빠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애초에 부유층만 유학을 보내 고환율 타격을 버티는 듯하다”라고 했다.

◇기업들은 고환율 직격탄

인천국제공항 아시아나항공 화물터미널에서 2021년 12월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들이 화물기에 화물을 싣고 있는 모습(기사 내용과 무관). /뉴스1

반면 당장 수입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며 영업 이익이 줄어드는 기업들은 고환율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국내 정유 업계는 연간 10억배럴 이상의 원유를 해외에서 달러로 사들이고, 항공사들은 영업 비용의 약 30%를 차지하는 유류비를 비롯해 항공기 리스료, 해외 체류비 등 고정 비용을 달러로 결제한다. 국내 식품 제조 업계는 밀·대두·옥수수·원당 등 원재료 수입 의존도가 높다.

환율 방향을 가늠하기 힘든 수출 기업도 노심초사하고 있다. 올해 3분기 국내 기업의 외화 예금 월 평균 잔액은 918억8000만달러(약 135조원)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상품 수출 대금을 달러로 받은 기업들이 이를 원화로 바꾸지 않고 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국내 기업의 올해 3분기 누적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2% 늘었는데, 같은 기간 외화 예금 잔액은 8.8% 증가했다.

◇“환율 방향 바뀌면 위험”

지나친 ‘환테크(환율+재테크)’가 독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KB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지난 18일 기준 달러보험 판매액은 1조5015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달러로 보험료를 내고 보험금을 받는 방식 때문에, 앞으로 환율이 더 오를 것으로 기대한 개인들이 가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급증세에 금융감독원은 “달러보험은 환테크 상품이 아니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지금은 개인의 고환율 경계감이 과거만 못하지만, 환율이 방향을 바꾸면 서학개미들 자산이 줄며 ‘악’ 소리가 날 우려가 있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