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스타인 문건’ 세상에 나온다…트럼프 서명만 남아

미국 집권 공화당이 지난 수개월간 의회 본회의 표결을 지연시켜왔던 ‘제프리 엡스타인 문건’ 공개 법안이 상·하원에서 사실상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향후 공개될 문건의 내용이 미 정·재계에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주목된다. 문건 공개에 반대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 방식이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등 지지 기반을 분열시키고 공화당에 대한 장악력을 약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 관련기사 2면
미 하원은 18일(현지시간) 엡스타인 문건 공개 법안을 427 대 1로 통과시켰다. 공화당 의원 216명, 민주당 211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트럼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인 극우 성향 클레이 히긴스 의원(공화·루이지애나)만 반대표를 던졌다. 민주당 3명, 공화당 2명은 기권했다.
이 법안은 2019년 수감 중 사망한 미성년자 성착취범 엡스타인과 관련해 법무부가 보유한 모든 수사 자료를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이다.
로 카나 민주당 의원(캘리포니아)과 법안을 공동발의한 토머스 매시 공화당 의원(켄터키)은 “오늘 우리는 수십년 전에 진작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낼 기회를 갖게 됐다. 바로 피해자와 생존자를 위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안이 하원을 통과한 지 몇시간 후에 상원도 같은 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법안이 내 책상으로 오면 곧바로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마침내 열리는 판도라 상자…‘엡스타인 네트워크’ 드러나나
각국 정·재계 인사 친분…범죄 사실 확인 넘어 엘리트 인맥 규명 단초
법무부, 문서 일부 공개 거부 가능성…트럼프는 “난 아무런 관계 없어”
공화당 몰표, 트럼프 당 장악력 한계 분석…일각 “지지층과 갈등 신호”
공화당이 수개월 동안 이 법안의 상정을 피하려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날 표결 결과는 극적인 반전으로 평가된다. 공화당 지도부는 문건 공개를 요구하는 여론, 법안 처리에 반대할 경우 직면하게 될 역풍 등을 고려해 일제히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법안에 결함이 있다면서도 “우리 중 누구도 (반대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고 투명성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면 법무부는 30일 이내에 엡스타인 사건 관련 모든 자료를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 엡스타인은 생전에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친분을 쌓았다. 문건 공개는 단순히 엡스타인의 범죄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그와 긴밀히 얽힌 미국 및 전 세계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를 규명할 단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법무부가 “현재 진행 중인 수사나 기소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문서의 제출을 보류할 수 있다”는 법안 조항을 활용해 일부 문서의 공개를 거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백악관 변호사였던 타이 콥은 팸 본디 법무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엡스타인 문건에 등장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 등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는 이유로 문건 상당수를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관련 질문을 받고 “나는 엡스타인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거듭 밝혔다. 그는 “난 그가 역겨운 변태라고 생각해 오래전에 내 클럽에서 쫓아냈고 결국 내 판단이 맞았다”며 “엡스타인 이슈는 민주당의 사기극”이라고 말했다. 문건 공개에 반대해온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의 무더기 이탈표가 예상되자 지난 16일 “숨길 것이 없다”며 공개 찬성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공화당 상·하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도 문건 공개 법안에 몰표를 준 것은 그의 당 장악력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더힐은 해석했다. 이달 초 뉴욕시장 선거 등에서 패한 공화당이 트럼프 대통령 지시에 따라 엡스타인 문건 공개에 반대할 경우 내년 중간선거에서 참패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 매체는 지적했다.
일부 공화당 의원은 이번 사태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과 그를 두 번째 집권으로 이끈 핵심 지지층 사이에 갈등이 심화하는 뚜렷한 신호라고 말했다. 매시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그의 지지 기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는 ‘엡스타인 문건을 원하면 더 이상 내 지지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순간 지지층과의 연결고리를 잃었다”고 했다.


“우린 함께일 때 강해져”…외로운 싸움 이겨낸‘생존자 자매들’
엡스타인 성착취 피해 생존 여성들
미 하원 표결 지켜보려 의회 앞 집결
통과 소식에 “드디어 이겼다”환호
‘제프리 엡스타인 문건’의 강제 공개를 명령하는 법안이 18일(현지시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것은 미성년자 성착취범 엡스타인이 2019년 수감 중 사망한 지 6년 만이자 그의 성범죄 사실이 경찰에 처음 신고된 지 20년 만이다.
엡스타인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한 탓에 엡스타인 문건 공개 요구는 외로운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싸움의 중심에 ‘생존자 자매들’이 있었다. 엡스타인에게 성착취를 당한 여성들이다.
생존자 헤일리 롭슨은 이날 워싱턴 의회의사당 앞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문제”라며 지금도 어디선가 같은 피해를 보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나섰다고 말했다.
엡스타인 범죄의 생존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 것은 피해자 버지니아 주프레의 죽음 이후부터였다고 USA투데이는 전했다. 이들은 지난 9월 의사당 앞에서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 “주프레는 생전 우리가 함께 모이기를 원했다. 주프레가 없었다면 우리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프레는 엡스타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최초의 피해자다. 그는 자신을 보고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시작한 많은 생존 여성의 트라우마 극복을 돕는 데 헌신해왔지만 지난 4월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사후 출간된 회고록 맨 앞장에는 “성적 학대를 겪은 생존자 자매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쓰여 있었다.
미 전역에 흩어져 사는 ‘생존자 자매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트라우마를 이겨내려 노력해왔다. 텍사스에 사는 호스피스 간호사 베나비데즈는 “엡스타인 범죄 생존자가 느끼는 고립감은 정말 크다. 다른 생존자 자매들 말고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USA투데이에 말했다.
미 하원 표결을 지켜보기 위해 이날 다시 의회로 모인 생존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결과를 기다렸다. 엡스타인에게 성착취를 당할 때 16세였다는 애니 파머는 “이렇게 함께 모일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며 “우리는 함께할 때 강해진다”고 CNN에 말했다.
하원에서 관련 법안이 427 대 1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됐다는 소식을 들은 생존자들은 환호했다. 다니 벤스키는 “우린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데 드디어 승리했다”고 말했다.
법안 통과의 또 다른 주역인 낸시 메이스 공화당 하원의원 역시 성적 학대를 겪은 생존자다. 그는 전 약혼자를 성폭행·성매매 등 혐의로 고발했다. 메이스 의원은 엡스타인 문건을 본회의에 강제 부의하라는 청원에 서명한 공화당 의원 4명 중 한 명이다. 메이스 의원은 이날 엡스타인 범죄 생존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당신들은 언젠가 정의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고 말했다.
워싱턴 | 정유진 특파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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