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마른 나무’의 계절을 통과한 시인들 [크리틱]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일년 중에서 가장 쓸쓸한 달,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걸쳐진 11월에는 기형도 시편을 학생들과 함께 읽는다.
20대 청춘에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고 노래한 시인 기형도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시인 기형도가 그렇지 않았을까.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권성우 |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일년 중에서 가장 쓸쓸한 달,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걸쳐진 11월에는 기형도 시편을 학생들과 함께 읽는다. 어언 출간된 지 36년의 세월이 흐른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된 시들은 여전히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20대 청춘에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고 노래한 시인 기형도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를 둘러싼 어떤 비극과 상처는 시인을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김현)으로 이끌었다. 그런 기형도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발성을 담은 시를 쓴다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리라. 누구나 우울과 비애를 마주하며, 때로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절박한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시인 기형도가 그렇지 않았을까.
최근 새롭게 번역된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를 읽다가 작가와 시인의 마음, 즉 글쓰기를 통한 표현 욕구와 그 인정에 대한 갈망을 적확하게 묘사한 구절을 만났다. “이야기꾼이란 자기 삶이라는 심지를 이야기라는 은은한 불꽃에 남김없이 타버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묘사할 때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차원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는 뜻이다” 같은 문장을 천천히 읽어본다.
벤야민은 히틀러 파시즘이 파리로 닥쳐오던 그 엄혹한 시기에도 글쓰기를 향한 열망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통해 미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마지막 행로에서도 자신의 소중한 원고가 들어 있던 가방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로서는 자신의 글이야말로 야만적 세상에서 스스로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에 무엇보다 원고가 들어있던 가방을 포기할 수 없었을 테다. 글쓰기라는 욕망을 둘러싼 그토록 절박한 심정을 다시금 생각한다.
몇몇 신간 시집을 들추어보다가 도종환의 ‘고요로 가야겠다’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정치의 세계를 운명적으로 통과한 시인의 삶과 세태를 진솔하게 반추하는 이 시집을 통해 시 쓰기를 향한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오만과 허세와 어리석음을 속죄하고/ 가장 겸허한 언어로 기도하고 싶다”(‘소원’)고 노래한 시인에게도 “인정받고 싶어 몸이 들썩거리는 날”이 있었다. 그런 시기를 되돌아보며 시인은 다음과 같이 한층 냉철한 인식에 도달한다. “그대와 함께 아름다운 꿈을 꾸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 더 많았다” 이제 시인은 “지상에는 길을 잃은 이들이 많다/ 길 잃어/ 삶의 곳곳이 낭떠러지인 이들이 많다”며 착잡한 시대 상황을 응시한다.
현실 정치를 통해 인간 세계의 온갖 모습을 목도한 시인은 “산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허무를 끌어안고 그 끝에서/ 다시 처절하게 시작하는 게 삶”(‘끝’)이라는 귀한 통찰에 이른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엄습한 추위는 쓸쓸한 늦가을을 더욱 스산하게 만든다. 기형도가 묘사한 검고 마른 겨울나무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도종환 시인이 “지나온 내 생애도 찬바람 몰아치는 날 많았는데”라고 적었듯이, 그런 추운 겨울을 통과한 시인만이 비로소 펼쳐 보일 수 있는 정갈한 미적 경지가 존재한다. 도종환 시집 ‘고요로 가야겠다’는 “공허의 끝/ 그 끝에서 다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일”, 그 정직하고 겸허한 시적 고투의 기록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신안 해상서 267명 탄 여객선 좌초…3시간 만에 승객 전원 구조
- 통발에서 사라지는 미끼…카메라에 잡힌 ‘의외의 범인’은?
- ‘양평 공흥지구 특혜’ 의혹 김건희 오빠 김진우 구속영장 기각
- “국무회의 참석자 직접 골랐나” 묻자…윤석열 “생각나는 사람 전화했다”
- 삼성전자 내부망에 직원 민감정보 그대로…노조, 근로감독 신청
- 미국 몰래 시작한 한국 첫 잠수함 장보고함, 34년 임무 완수
- 검찰조직 장악 ‘믿을맨’ 전면에…‘항소 포기’ 논란 정면돌파
- “조용해라 돼지야”…트럼프, ‘엡스틴’ 질문 기자 향해 폭언
- ‘감치 선고’ 김용현 변호사 2명, 서울구치소 수용 거부로 석방
- ‘론스타 승소’ 호재에도…민주, 대대적 홍보 못 하는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