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이 쌓아올린 21세기 성곽(城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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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스스로를 '기회의 땅'이라고 말해왔다.
노력하면 이동할 수 있고 교육과 성실이 계층을 넘는 사다리가 된다고 믿었다.
교육정책은 공정성을 말할 수 있다.
서울에 집 한 칸 없는 사람도 어깨 숙이지 않고 살 수 있는 나라, 출발선이 부모의 주머니로 결정되지 않는 나라야말로 지속가능한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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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수년째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규제 완화와 특례 대출, 정책 혼선을 반복하는 동안 집을 가진 사람의 자산은 불어났고 무주택자는 멀어진 꿈만 바라본다. 갭투자를 '적폐'라 말하던 정치인들이 정작 자신은 갭투자에 손댄 사실이 드러나며 내로남불을 넘어 조롱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성은 그렇게 쌓여간다. 규제가 걸러내는 건 투기세력이 아니라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성 밖 사람들이다.
주택 문제는 단순한 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자산의 유무가 기회의 양을 결정하고 안정의 크기를 정한다. 서울에 땅 한 평, 집 한 칸 없는 사람은 월세와 전세 시장을 떠돌며 금리·전세 사기·역전세 위험 같은 쇼크를 정면으로 맞는다. 반면 성안 사람들은 정책 변화의 충격을 자산으로 흡수한다. 같은 나라, 다른 시간대를 사는 풍경이다.
교육에서도 양상은 비슷하게 전개된다. 학군은 지역의 격차를 넘어 사실상 부모의 경제력을 재확인하는 지표가 됐다. 소위 SKY로 불리는 명문대학과 '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 메디컬 입시, 사법고시 폐지 후 시행한 로스쿨제도는 현대판 음서제(?)로 불리며 기득권 자녀들을 위한 '성(城) 안의 성(城)'을 만드는 역할로 전락한 듯싶다.
제도는 공정을 말하지만 공정의 출발선이 서로 다르다는 냉혹한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기회의 사다리는 점점 경사가 가팔라지고 성 안 사람에게는 계단이지만 성 밖 사람에게는 절벽이 된다.
문제는 이 구조가 고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불평등은 어느 순간 단순한 격차를 넘어 계급이 되고, 계급은 세대를 넘어 이동을 막는다. 한국사회가 '탈계급화'에서 '재계급화'로 되돌아가는 흐름을 보이는 이유다. 성 안 사람들은 이제 성을 지키는 데 익숙해졌고 성 밖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성문 앞에서 절망하며 발걸음을 멈춘다.
부동산 정책은 시장을 살리기 위한 처방일 수 있다. 교육정책은 공정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는 성 안의 울타리만 더 높였고 성 밖의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었다. 성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안정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고, 성 밖 사람들은 좌절의 원인을 개인 탓으로 돌리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 구조가 오래 지속할수록 사회의 신뢰와 유연성은 더 빨리 사라진다.
한국사회는 결국 선택해야 한다. 성곽을 유지한 채 미래로 갈 것인가, 아니면 성벽을 허물고 모두가 같은 땅을 밟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서울에 집 한 칸 없는 사람도 어깨 숙이지 않고 살 수 있는 나라, 출발선이 부모의 주머니로 결정되지 않는 나라야말로 지속가능한 공동체다.
한국사회는 이 간극을 어떻게 줄일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계층 고착은 사회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불신과 갈등을 키운다. 성 안 사람과 성 밖 사람이 서로를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인식하는 사회가 오래갈 리 없다. 기회 구조의 재설계, 교육과 주거의 접근성 확대, 제도의 공정성 강화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곽은 시대에 따라 사라지는 법이다. 돌로 쌓은 성은 풍화로 허물어지고 권력으로 쌓은 성은 변화로 무너진다. 한국사회의 새로운 성벽도 그렇게 무너져야 한다. 그것이 성 안과 성 밖 모두가 숨 쉬는 사회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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