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업무 매일이 도전…수어 편견 사라졌으면"

정유선 기자 2025. 11. 1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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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수어’가 아닌 ‘살아있는 수어’를 쓰기 위해 매일 농인들과 소통합니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아요” 란 첫 인사에 박지연(47)수어 통역사는 “네 그런 말씀 많이 들어요”라고 했다. 알고보니 우리가 알게 모르게 TV에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대통령실 최초의 수어통역사로 임용된 박 기술요원 얘기다. 박 통역사를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만났다.

1998년 수어를 처음 접한 뒤 2008년 수어통역사 자격증을 땄고, 이후 국회방송, 국회 소통관 등에서 근무한 박 통역사는 올해 7월 말 대통령실 1호 수어통역사로 발탁됐다. 원래 전공은 중국어였지만 스무살 때 교회 모임에서 농인을 만나 “‘소리 없는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된 것을 계기로, 농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수어를 공부하게 됐다.

박 통역사의 임용은 대통령실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마무리하며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선 대통령, 실장들과 나란히 서 수어통역을 했다. 과거엔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K-TV에서 제공하는 대통령실 대변인 브리핑 화면에서 매일 그의 수어 통역을 접할 수 있다. 다만 주요 방송사에서는 방송사 소속 수어통역사가 있어 대통령실에서 수어 통역이 빠진 ‘클린본’ 영상을 제공받아 사용하는 탓에 일부 시간대는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사각지대가 생기는 게 안타깝다고 그는 말했다.

주요 방송사들이 제공하는 수어통역 화면은 16분의 1 정도로 작아 손 동작이 잘 보이지 않지만 대통령실 송출화면은 12분의 1 정도로 화면이 커져서 수어가 보다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다고 한다. 박 통역사는 “미국과 유럽은 수어통역 화면이 훨씬 크고, 일본의 경우 수어통역 화면이 아예 화면 가운데 있는 방송사도 있다”며 “우리도 수어화면이 더 커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박지연 대통령실 수어통역사가 지난 6일 서울 용산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국제신문 인터뷰에서 수어로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김정록 기자


베테랑 수어통역사인 그에게도 대통령실 업무는 매일매일이 도전이다. 대통령실 업무가 워낙 방대하고 전문적인 부분이 많은 탓이다. 최근엔 ‘팩트시트’란 단어가 이슈가 됐는데 수어 표현을 물어보니 “합의했는데 서류가 아직 안됐다. 문구 조정중이다” 라는 식으로 상황을 풀어 의미를 전달했다. 손의 움직임이 자신을 향하는지 바깥으로 향하는지에 따라 상호간 어느 쪽에 유리한 합의인지를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준 박 통역사는 “그래서 ‘공간 사용’이 중요하다. 이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AI 분야를 비롯해 각종 전문용어들을 어떻게 하면 정확한 뜻을 전달할지 매일 고민하고 있다는 그는 지금까지 통역하면서 가장 까다로운 용어가 뭐였냐는 질문에 ‘국가 에너지 믹스’를 들었다. 에너지를 의미하는 딱 떨어지는 수어표현이 없어 그녀는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섞는다’고 풀어서 설명을 한다. 상당수 통역사들은 손쉽게 에너지 대신 전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경우 ‘국가가 전기를 섞는다’는 식으로 오역이 된다는 것.

올초 국회 수어통역사들이 무더기로 계약해지 당하면서 수어 통역사들의 처우가 이슈가 된 적 있다. 직고용이 아닌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을 하다보니 신분이 불안정할 뿐 아니라 급여도 ‘시급’도 아닌 ‘분급’으로 계산하면서 그나마 대기 시간은 제외하는 등 열악한 처우에 놓여 있었다. 최근 전문임기제로 직고용 전환이 결정됐지만 공무직 전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통역사는 “1년짜리 프리랜서 계약에서 2년짜리 임기제 계약으로 바뀐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게 소원이었는데 마지막 꿈을 이뤘다”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좀 더 묵직한 꿈을 이야기했다.

“2016년 수어언어법이 통과되면서 우리나라 언어로 인정을 받았음에도 초등학교에 아직 수어 교과가 없다”면서 “초등교육에 수어가 의무적으로 교육이 돼서 이 땅에 태어난 어린 아이들이 수어도 외국어 같은 하나의 언어라는 걸 깨달았으면 한다”고 했다. “수어를 쓰는 농인이 그저 장애인이 아니라 멋진 언어를 쓰는 분이구나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되고 차별적인 시선이 사라지는 평등한 세상이 왔으면 하는 게 저의 꿈”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통령실에 와서 느낀 건 각자 자신의 역량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돼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라며 “그걸 보면서 농인들도 잘하는 것을 인정받고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농인들이 귀는 안 들리지만 눈으로, 또 손으로 하는 것은 정말 탁월하다”며 “도장 파는 것, 구두 만드는 것, 디자이너, CCTV에서 범죄를 포착하는 것 등 잘하는 게 많은데 일단 농인이라고 하면 탈락시켜버린다”며 “농인들이 잘하는 영역에서 직업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힘든 점을 묻자 “보안 때문에 영상통화를 못 하는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농인들과 하루에도 수십 번 영상통화를 하며 소통하고, 통역에 대한 피드백도 주고받는데 영상 통화를 못해 답답하다는 것.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차에 올라 영상통화부터 켠다는 그는 “외국어 공부할 때처럼 계속 외국어를 듣고 써야 하는 것처럼 수어도 마찬가지”라면서 “그래야 살아있는 수어를 쓰게 된다”며 프로답게 웃었다.

박지연 대통령실 수어통역사가 지난 6일 서울 용산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국제신문 인터뷰에서 수어로 ‘평화’를 얘기하고 있다. 김정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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