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오스만제국을 가다] 400년 ‘제국의 심장’… 절제된 건축미 품은 중정들의 향연

정순민 2025. 11. 1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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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전성기 제국의 미학, 톱카프 궁전
바다 향한 언덕 위 70만㎡ 넘는 규모
거대한 도시이자 통치철학 형상화 공간
입구 ‘바브-이 휘마윤’ 넘으면 새로운 질서
정복한 도시의 긴장 끊고 분리하는 경계
왕실 의례 열리던 ‘제1중정’ 압도보다 정돈
전각들 흩어진 ‘제2중정’엔 이즈니크 타일
‘제3중정’ 엔데룬 구역 들어서면 더 고요
‘제4중정’엔 해협 맞닿은 정자들 자리잡아
전성기 제국의 미학은 화려한 장식이 아닌
자연·인간·신의 질서를 한 공간에 담아내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이스탄불 사라이부르누 언덕에 위치한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의 통치철학을 건축으로 형상화한 공간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이스탄불의 아침은 보스포루스의 물빛에서 고요히 깨어난다. 해협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사라이부르누 언덕을 스친다. 그리고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도시는 점차 고요해진다. 한때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제국의 중심을 지켜보던 이 언덕은, 지금도 바람을 먼저 맞고 빛을 가장 먼저 끌어안으며, 그 정점에 오스만의 정치·생활·신앙·의례가 집약된 톱카프 궁전을 품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직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건축됐으며, 이후 약 400년 동안 제국의 심장이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유명하지만 당시의 톱카프는 술탄이 거주하고 정무를 수행하며 황실 가문과 근위대, 관료 교육기관이 함께 생활하던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고 오스만의 통치철학을 건축으로 형상화한 공간이었다.

톱카프 궁전 입구. 튀르키예문화관광부 제공

■오스만의 통치철학 아로새긴 톱카프궁전

톱카프는 고정된 대칭축을 따라 늘어선 유럽식 궁정 건축과 달리 기능을 중심으로 공간이 차례로 깊어지는 구조다. 바다를 향한 언덕 위 70만㎡가 넘는 광활한 대지 위에 세워졌으며 네 개의 중정과 하렘, 정자(키오스크), 보물관, 의전공간 등이 성벽처럼 둘러싸여 있다.

궁전으로 들어서는 입구, '바브-이 휘마윤'(황제의 문)은 외형만 놓고 보면 다른 제국의 궁문에 비해 크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설수록 문 자체가 품고 있는 상징성과 건축적 긴장이 감지된다. 문턱 위에는 메흐메트 2세의 투그라(황제의 인장)가 부착돼 있고, 그 아래로 신의 이름이 빛나는 금빛 서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정복의 도시에서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는 선언, 그리고 그 통치가 신의 질서와 함께 이뤄진다는 오스만의 정치적 정당성이 문 위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문은 두께가 상당하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소리가 자연스럽게 차단된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바깥의 도시와 '긴장'을 공유하던 공기가 끊어지고, 궁전 내부만의 독자적 리듬이 시작된다. 그 짧은 통로는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경계' 그 자체다. 정복한 도시의 외부와 제국의 질서가 구현되는 내부를 분리하는 공간. 오스만의 정치적 상징은 종종 조용한 방식으로 구현됐고, 황제의 문은 그 첫번째 장치였다.

문을 지나면 시야가 갑자기 넓어진다. 제1중정(알라이 광장)은 오늘날 '정원' 같은 인상을 주지만, 역사적으로는 제국의 안보와 위계가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공간이다.

톱카프궁전 소장품들. 튀르키예문화관광부 제공

제1중정은 넓은 나무 그늘 사이에 길게 뻗은 돌길이 이어지고, 회백색 성벽이 느릿한 곡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온갖 과시적 건축물로 방문객을 압도하던 서유럽의 궁정과 달리 톱카프의 첫 정원은 압도보다 '정돈'을 선택했다. 제국의 힘은 과장의 형식이 아니라, 절제된 질서에서 비롯된다는 지향이 이 첫 공간에 고스란히 배어있는 것이다.

과거 이 중정에서는 근위대의 교대식, 왕실의 의례 행렬, 외부 사절단의 첫 환영이 진행됐다. 하지만 공간은 어디까지나 열린 채 자연을 품고 있다. 이는 오스만의 건축철학이 권력을 자연의 일부로 두려 했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곧 전면에 배치된 거대한 석조 구조물 대신 길게 드리운 나무 그림자와 부드러운 흙길, 간격을 두고 지어진 건물들이 '과시 이전의 단정함'을 만들어내고 있다.

제1중정에는 과거 승마장과 병사의 막사가 자리했고, 한편에는 비잔틴 시대 수도원 터가 남아 있어 정복 이전의 역사가 궁전 내부에 자연스럽게 포개져 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궁전의 시간 축이 단절되지 않고 층위처럼 겹쳐 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는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가 건물의 벽에 흡수되고, 말발굽이 울리던 넓은 공터는 지금은 여행객의 발자국만 남기고 있다.

두번째 중정으로 들어서면 궁전의 독특한 구조가 한눈에 드러난다. 전각들이 대칭을 이루지 않고 기능에 따라 흩어져 있는데, 이는 오스만 행정체계의 다중적 권력 구조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파샤들이 모여 재정을 논하던 디완 전각, 원형 회랑이 휘감은 고요한 중정, 그리고 정원을 가르는 통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공간은 점차 깊어진다.

오스만 특유의 미학을 보여주는 이즈니크 타일로 장식된 톱카프 궁전 내부. 튀르키예문화관광부 제공

전각 안으로 들어서면 이즈니크 타일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사프란볼루의 창문 너머로 보이던 그 타일이 여기선 전면의 세계를 구성한다. 코발트와 터키석, 붉은색 안료가 유약 아래에서 부드럽게 흐르며 빛을 머금는데, 이는 오스만 장인들이 여러 문명으로부터 기법을 흡수해 재창조한 미학의 정점이었다. 타일의 색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지는 빛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건물 자체가 '숨을 쉬는 것처럼' 공간을 바꾸어낸다.

세번째 중정, 엔데룬 구역에 들어서면 궁전의 분위기는 한층 더 조용해진다. 이곳은 술탄의 근위와 엘리트 관리들이 교육받던 공간이자 제국의 실질적 의사결정이 이뤄지던 곳이다. 이어 펼쳐지는 바그다드 정각과 거울의 정각은 이 중정의 아름다움과 절제를 상징하는 대표적 전각이다. 화려한 금박과 기하학 문양이 천장과 벽면에 펼쳐져 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오히려 담백해 보인다.

회랑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면 보물관, 곧 하즈네가 나타난다. 무함마드의 검, 거대한 에메랄드가 박힌 톱카프 단검, 금사로 직조한 예복, 인도에서 바쳐진 옥 왕좌 등 제국의 물질문명이 이곳에 응축돼 있다. 그러나 유물 하나하나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수백년간의 무역·외교·군사기술이 교차한 결과물이다. 이들은 오스만이 전쟁의 제국이면서도 기술·공예의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과시적인 서유럽과 달리 절제미 돋보여

복도를 따라 옆으로 꺾어 들어가면 하렘의 복잡한 회랑이 나타난다. 서구의 상상 속 하렘은 관능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야사에서 전해지던 모습과 달리 실제 하렘은 황실 여성과 친위 여성들이 생활하고 교육받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였다.

마지막으로 해협과 맞닿은 정자들이 자리한 제4중정에 다다르면, 넓어진 시야로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건물은 바다를 향해 배치돼 있고, 정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보스포루스의 물빛은 끝없이 이어진다. 아마 술탄들은 이곳에서 해협을 오가는 배들의 돛을 바라보며 두 대륙을 잇는 제국의 중심부에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바람이 지나가며 커튼을 흔들고, 물결이 반사된 빛이 천장에 출렁이듯 비칠 때, 이 공간이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제국의 '세계관' 그 자체였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해가 기울고 정원에 그림자가 드리우면 궁전은 낮보다 더 고요해진다. 회랑의 돌바닥에 저녁 햇빛이 마지막을 비추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잔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궁전 안으로 번진다.

자연과 건축, 인간의 생활이 하나의 호흡을 이루는 순간. 전성기 오스만 제국의 미학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바람과 빛, 돌과 나무, 인간과 신의 질서를 하나의 공간에 담아내는 능력이었다. 오늘도 톱카프 궁전은 그 조용한 미학을 담담히 품은 채 수백년 전과 같은 바람을 맞고 있다.

[옛 오스만제국을 가다] 400년 ‘제국의 심장’…
양우진 한국외대 국제관계학 박사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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