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스트처치: 정원 위의 예술 도시

김소은 2025. 11. 18.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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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제주를 보다] ⑫ 관광의 도시를 넘어, 시민이 다시 세운 도시의 품격

제주는 '섬'이다. 그래서 지속 가능성을 얘기할 때는 늘 개발과 보존을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섬나라 뉴질랜드는 산악, 호수, 해안선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등 제주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김소은 THE 관광연구소 대표가 안식년으로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관광 1번지'를 지향하는 제주가 참고할 만한 뉴질랜드의 사례를 가지고 독자들과 비정기적으로 만난다. [편집자 글]

뉴질랜드 남섬의 남동 해안, 캔터베리 평원의 끝자락에 자리한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 마오리어로 Ōtautahi)는 남섬 여행의 관문이자 정원도시(Garden City)로 불리는 곳이다. 도시명은 영국 옥스퍼드의 Christ Church College에서 비롯되었는데, 19세기 중반 이곳으로 이주한 영국 정착민들이 그 이름에 고향의 이상을 담았다.

그 무렵 영국 사회에는 정원도시 운동(Garden City Movement)이라는 도시계획 사상이 퍼지고 있었다. 산업화로 인한 오염과 과밀화를 피하고, 자연 속에서 인간이 여유롭게 사는 도시를 만들자는 이상이었다. 주거지와 공원, 공공시설을 녹지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삶이 곧 자연'이 되는 도시를 설계하려 했다. 이러한 사상이 뉴질랜드로 건너와, 크라이스트처치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식민 도시'로 구상되었다.

그들이 세운 도시는 단순한 개척지가 아니라, 유럽의 이상을 남반구의 자연 위에 새긴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지금의 크라이스트처치가 도시보다 정원이 먼저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극에서 시작한 여행

여행의 첫 발걸음은 공항 맞은편의 국제남극센터(International Antarctic Centre)였다. "남극은 꼭 다녀오라"던 선배의 조언을 현실적으로는 따를 수 없었지만, 이곳 체험관은 남극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남극 탐험대의 기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 안에는 눈보라를 재현한 폭풍 체험실, 거친 설원을 달리는 해글룬 라이드(Hägglund Ride) 탑승,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작은 종인 파란 펭귄(리틀 블루 펭귄)을 돌보는 전시 수조가 관람객을 맞는다. 그 외에도 4D 영화관, 빙원을 달리는 썰매견과의 만남, 어린이를 위한 인터랙티브 놀이 공간 등이 마련되어 있다. 오래된 공간인지라 일부 전시관은 조금 조악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 또한 이 나라를 이해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특히 해글룬 라이드 탑승은 기대 이상이었다. 허리가 아프거나, 임산부일 경우 탑승이 제한된다는 안내를 한 이유가 느껴졌다. 궤도 차량이 남극의 얼음 언덕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흙길 언덕을 오르내리며 굉음을 내뿜을 때, 마치 사막에서 사륜구동차를 타는 느낌도 났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속도감도 느껴졌다. 여러 대의 차량 중 하나의 옆면에는 선명한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펄럭이는 붉은 문양은 남극 연구에 참여한 한국 탐험대를 상징하듯, 낯선 설원 위에서 반가운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또한 4D 영화관에서는 바닥이 흔들리고 좌석 옆에서 바람이 실제로 불어오는 연출도 나름 재밌었다. 배를 타고 나가면 차가운 남극바다의 물이 튀고, 펭귄이 물을 털면 내게도 물이 튀고, 바다사자가 침을 뱉기도 하는 등 목 부위로 물을 계속 뿌려 젖어 나왔다. 

허스키 세션 시간에 맞추어 참여하면, 실제로 탐험에 동원되던 썰매견들을 만나고 핸들러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타임이 있다. 곁에 선 아이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시베리안 허스키를 가리키며, "이 강아지 이름은 뭐예요??!!" 하며 묻는 귀여운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한국정부가 국제남극센터에 기증한 해글룬 라이드 / 사진=김소은

정원도시의 품격

이후 숙소로 향하는 길은 마치 공원 속을 달리는 것 같았다. 가로수를 따라 이어진 장미 울타리, 가지마다 매달린 꽃과 새소리, 잔디 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식물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이 실감되게 눈에 익숙한 꽃과 나무들도 많이 보였다. 

크라이스트처치의 매력은 도시보다 자연이 더 주인공이라는 점에 있다. 그 중심에는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s)이 있다. 1863년 영국 이주민들이 식민지 도시의 중심에 '공공 정원'을 조성한다는 계획 아래 설립되었다. 면적은 약 21헥타르로 도시 전체를 감싸는 해글리 파크(Hagley Park) 안쪽에 자리하며, 도심 녹지 체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식물원 중심을 가로지르는 에이번 강(Avon River)이 동서 방향으로 흐르며, 정원의 생태적 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정원은 크게 테마 구역별로 10개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구역으로는 영국식 전통 정원 양식을 재현한 장미정원(Rose Garden)이 있고, 뉴질랜드 자생식물을 중심으로 한 구역 등이 있다. 특히 커닝햄 하우스는 1920년대에 건립된 철골 유리 온실로, 현재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식물의 종 구성은 전 세계 6대 식생대의 주요 수종을 망라한다. 2024년 기준 10,000종 이상의 식물이 등록되어 있으며, 그중 약 1,500종은 뉴질랜드 토착종이다. 중앙 연못과 강변에는 뉴질랜드 수생식물 보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봄철에는 튤립과 수선화, 여름에는 장미, 가을에는 단풍나무, 겨울에는 겨울딸기 등 계절별 식재가 교체된다.

봄이면 튤립과 수선화, 벚꽃이 잔디 위를 수놓고, 여름이면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로 강변이 붐비며, 가을이 오면 식물원은 금빛으로 물든다고 한다. 단풍나무와 포플러가 붉고 노란 잎을 흩날리고 나면, 겨울에는 잎을 모두 털어낸 나무들 사이로 서늘한 빛이 맺히고, 잔잔한 안개가 강 위를 감싸며 도시를 조용히 덮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이 정원의 숨결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꽃이 피고 지는 일, 바람이 불고 멎는 일 모두가 이 도시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보타닉가든내 장미정원 / 사진=김소은

예술과 유산이 공존하는 아트센터

도심의 중심부에 자리한 크라이스트처치 아트센터(The Arts Centre Te Matatiki Toi Ora)는 한때 캔터베리 대학이었던 곳을 복원해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19세기 말 고딕 리바이벌 양식의 건물들이 아케이드와 회랑으로 이어져 있어,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느껴진다.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들은 오랜 복원 과정을 거쳐 다시 문을 열었고, 지금은 예술과 교육, 공연과 영화, 박물관과 숙박시설이 함께 어우러진 살아 있는 문화지형으로 거듭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중에 매달린 검은 집 모양의 조형물 에코(Echo)다. 뉴질랜드 조각가 닐 도슨의 작품으로, 바람에 따라 모양이 달라져 하늘 위에 그려진 선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올리고, 그 순간 하늘과 예술이 맞닿아 있음을 다시금 느낀다.

중정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와 공연이 열리고, 대공연장(Great Hall)에서는 강연과 실내악, 연극이 이어진다. 목조 천정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빛 속에서, 공간은 과거의 유산이 아닌 살아 있는 무대로 변한다.

남쪽 건물에는 고대 유물박물관 티스 뮤지엄(Teece Museum)과 부티크 영화관 루미에르 시네마가 나란히 자리한다.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수공예품 가게와 카페가 이어지고, 주말이면 거리공연과 플리마켓이 열려 활기가 넘친다. 오후의 햇살이 석재 벽에 스며들면, 이곳은 더 이상 복원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 있는 예술의 현장처럼 느껴진다.

돌벽의 질감, 아이들의 웃음, 회랑에 울리는 발걸음, 그리고 플루트의 선율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니 아트센터는 그저 유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이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가장 감동적인 공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크라이스트처치 아트센터의 대표적 조형물인 공중에 떠 있는 에코(Echo) / 사진=김소은

펀팅, 트램, 곤돌라 — 치치의 세 가지 매력

크라이스트처치(현지에서는 '치치'라 부른다)의 대표 관광자원은 펀팅, 트램, 곤돌라다. 나는 이 순서대로 가장 인상 깊었다. 이 셋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통합 관광 패스(Punting, Tram & Gondola Combo) 상품이 운영되고 있다. 세 가지를 각각 구매하는 것보다 약 20~30% 저렴하며, 하루 안에 크라이스트처치의 대표 명소를 모두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트램으로 도심을 한 바퀴 돌고, 에이번 강에서 펀팅을 즐긴 뒤, 곤돌라를 타고 히스코트 밸리 정상에서 도시와 바다를 조망하는 일정이다. 예약은 온라인과 현장 모두 가능하며, 이용권은 유효기간 내에 나누어 사용할 수도 있다. 느림과 여유, 그리고 풍경이 어우러진 크라이스트처치의 정수를 가장 효율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코스다.

보타닉 가든을 따라 흐르는 에이번 강의 펀팅은 1986년부터 관광객이 이용해 온, 크라이스트처치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체험이다. 그 기원은 19세기 영국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유행하던 유람문화에 있다. 출발점이 되는 앤티과 보트셰드(Antigua Boat Sheds)는 1882년에 세워진 목조 건물로, 현재 뉴질랜드 유산 1등급으로 지정되어 있어 펀팅의 역사와 함께 도시의 오랜 시간을 품고 있다.

검은 베레모와 베이지색 조끼 차림의 펀팅맨은 마치 고전 영화 속 인물 같다. 대부분 현지 대학생이나 젊은 예술가들로,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의 손에는 전통적인 나무 장대가 들려 있고, 배를 밀 때마다 물결이 부드럽게 갈라진다.

둑을 따라 걷던 사람들이 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잔잔한 물결 위로 흩어졌다. 나 역시 배 안에서 그들을 향해 렌즈를 들었다. 강 위와 강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를 찍는 사람들, 그 장면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고요했다. 바람은 부드럽게 볼을 스치고, 배는 느린 리듬으로 물결을 따라 도시의 오후를 밀어냈다. 눈부신 강 위에서 나는 한 폭의 풍경 속 인물이자, 그 풍경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어 있었다.
에이번 강 펀팅 중 만나는 풍경 / 사진=김소은

크라이스트처치의 트램(Christchurch Tram)은 도시의 시간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간다. 나무 의자와 황동 손잡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전차 안에서 보는 거리 풍경은 오래된 필름 같다.

1882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해 1995년 관광용 트램으로 복원된,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품은 도심 순환 전차다. 현재 복원된 빈티지 트램 17대 중 8대가 실제 운행 중이며, 17개 정류장을 약 한 시간에 걸쳐 천천히 한 바퀴 돈다. 트램은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주요 관광지인 대성당 광장, 식물원, 리버사이드 마켓, 아트센터 등을 연결한다. 저녁에는 식사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트램 레스토랑이 운영되어, 움직이는 식당 안에서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속도는 느리고 이동거리는 짧지만, 오래된 전차 안에서 흘러가는 그 느린 시간이야말로 크라이스트처치 여행의 여유를 완성한다.
스페인거리를 가로지르는 트램 / 사진=김소은

크라이스트처치 곤돌라(Christchurch Gondola)는 도심에서 약 10km 떨어진 히스코트 밸리(Heathcote Valley)에 위치해 있다. 도심에서 곤돌라 승강장까지는 자동차로 약 15분, 시내 버스나 유료 셔틀버스가 중심가 트램 정류장 근처에서 수시로 운행된다. 케이블카는 약 1km 구간을 10분 남짓 올라가며, 정상의 전망대에서는 캔터베리 평원과 리틀턴 항만,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부 역에는 카페와 전시관, 그리고 타임 터널(Time Tunnel)이라 불리는 시뮬레이션 라이드가 있어 가족 단위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다.

밖으로 나가면 정상 남동쪽엔 리틀턴 하버(Lyttelton Harbour)가, 북서쪽은 태평양 방향으로 열린 페가수스 베이(Pegasus Bay)와 함께 멀리 캔터베리 평원을 따라 흐르는 여러 하천들이 바다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목장에 가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양떼들이 이곳에서는 손에 닿을 듯 가까이 풀을 뜯으며, 바람결에 흩어진 울음소리만이 고요를 깨운다. 정상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들고 도심의 북적임을 멀리 바라보면, 바다와 산, 그리고 평온한 시간까지 모두 한 장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곤돌라를 타고 오른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도시의 모습과 양떼들 / 사진=김소은

미식의 즐거움, 캔터베리의 맛

가장 인상에 남는 식사는 열심히 구글링해서 찾은 레스토랑(Twenty Seven Steps)에서 였다. 도심의 스페인 거리, 이국적인 타일 장식과 아치형 회랑이 이어진 작은 골목 안에 자리한 곳이다. 낮에는 거리 음악이 흐르고, 밤이면 노천 테이블 사이로 트램이 천천히 지나가며 종을 울린다. 오래된 건물의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따뜻한 조명 아래 차분한 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의 스테이크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캔터베리산 소와 양으로 만든다. 캔터베리 평원은 강과 바람이 빚어낸 비옥한 초원지대로, 하루 종일 바람이 불어도 풀이 마르지 않고, 사계절 내내 소와 양이 방목된다. 이렇게 자연 방목된 가축은 지방이 적당히 분포해 부드럽고 단맛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특별한 양념이나 기교 없이, 재료 그 자체의 맛으로 승부하는 방식이다. 한입 베어 물면 부드러운 육즙 속에서 초원의 향이 퍼지고, 지방이 녹아내리며 달콤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단순하지만 완벽한 밸런스였다. 뉴질랜드에서 맛본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
캔터베리 스테이크, 가니쉬로 올라간 대파 튀김이 반가웠다 / 사진=김소은

도심의 리버사이드 마켓(Riverside Market)은 종일 활기가 넘친다.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뒤섞여 걷고, 음악과 커피 향이 공기 속에 퍼진다. 철제 구조물과 따뜻한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작은 축제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곳은 지진 이후 침체된 도심 상권을 되살리기 위해 2019년 문을 연 복합식품 마켓이다. 약 8천만 뉴질랜드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로, 5년에 걸쳐 기획·설계·건설 과정을 거쳤다. 지역 농가와 수공업자들이 직접 운영하며, 임대료 대신 매출의 일부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건물은 에너지 효율을 고려한 친환경 설계로 지어졌고, 주말이면 플리마켓과 음악 공연이 열려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수공예품 가게, 와인바, 치즈 전문점, 디저트 숍이 줄지어 있고, 오클랜드에서는 보기 힘든 식재료도 많다. 라벤더 시럽, 산양유 치즈, 허브 올리브, 소규모 와이너리의 와인이 마켓 특유의 개성을 보여준다.

근처의 젤라또 맛집 롤리킨 젤라또(Rollickin Gelato)는 지진으로 무너진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2015년 젊은 지역 창업가들이 시작한 수제 젤라또 브랜드다. 크라이스트처치 중심가의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을 개조해 만든 디저트 가게다. 안으로 들어서면 주황빛 간판 아래로 환한 조명이 비추고, 오픈 키친 너머에서 젤라또가 매일 직접 만들어진다. 유리 진열대에는 수십 가지 맛이 줄지어 있는데, 모두 인공색소나 향료 없이 지역 농산물로 만든 수제 젤라또다. 바닐라와 피스타치오 같은 클래식한 맛부터, 블러드 오렌지, 솔티드 캐러멜, 레몬 커드 같은 독창적인 조합까지 고르는 재미가 크다. 긴 테이블이 놓인 내부는 늘 북적이지만, 벽면의 손글씨 메뉴판과 알록달록한 조명 덕분에 공간 전체가 밝고 유쾌하다. 한 스쿱을 떠먹는 순간, 우유의 부드러움과 과일의 산미가 어우러져 입안이 상큼하게 깨어났다. 하루의 여운이 달콤하게 녹아내려, 하루의 끝이 한층 따스해졌다.
원하는 만큼 시식이 가능한 인심 좋은 롤리킨 젤라또 / 사진=김소은

분수와 음악이 흐르는 타운홀의 밤

치치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타운홀(Christchurch Town Hall)이다. 지진으로 붕괴되었다가 완벽히 복원된 이 공연장은 '음악의 도시'로 돌아온 크라이스트처치의 상징이다. 건물 앞 정원은 풍경과 시간이 겹쳐지는 공간이었다. 잔디 위에는 도시락을 즐기는 가족들, 학술회의로 온 연구자들, 그리고 여행객들이 어울려 있었다. 푸른 나무 아래 피크닉 매트 위에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놓여 있고, 아이들은 미끄럼틀 대신 분수 주변에서 물줄기를 쫓았다.

정원의 중심에는 페리어 분수(Ferrier Fountain)가 서 있었다. 나는 보자마자 '민들레 홀씨다!' 하고 소리쳤는데, 실제로 '민들레 홀씨 분수(Dandelion Fountain)'라 불리고 있었다. 두 개의 구(球)와 하나의 반구 구조가 물방울처럼 퍼져나가며,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흩날리는 형상은 한국의 봄을 떠올리게 했다. 햇살이 물줄기를 비출 때마다 작은 무지개가 맺혀, 마치 음악의 리듬이 눈앞에서 보이는 듯했다.

건물 안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소리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복원된 공연장의 음향은 완벽에 가까웠고, 그 선율은 도시가 잃었던 시간을 위로하듯 따뜻했다. 회의실 복도에는 학회를 준비하는 발표 자료가 쌓여 있었고, 대강당 뒤편에서는 청소년 음악캠프 참가자들이 바이올린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 일상의 장면들 속에서 타운홀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크라이스트처치의 문화적 삶이 다시 숨 쉬는 공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크라이스트처지 타운홀 앞의 페리어 분수 / 사진=김소은

다시 피어나는 도시

치치의 관광안내문에는 '재건(Rebuild)'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의 큰 지진이 크라이스트처치를 강타하며 도시의 중심부 대부분이 붕괴됐다. 대성당과 시청, 수많은 상점이 무너졌고, 한때 활기를 잃은 거리는 먼지와 침묵 속에 잠겼다. 그러나 이 도시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을 다시 설계했다. 관광정책 또한 그 변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무너진 건물 자리에 들어선 '리스타트(Re:Start) 컨테이너 몰'은 그 상징적인 출발점이었다. 철제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임시 상점가였지만, 그곳에서는 도시의 상처가 감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위를 걸으며, 재건의 현재진행형을 직접 체험했다. "완성된 도시를 보러 오라"가 아니라 "다시 세워지는 도시를 함께 보자"는 초대장이었다.

지진 이후의 관광은 행정이 아닌 시민의 손에서 시작됐다. 무너진 돌을 다시 쌓고, 빈터에 임시 상점과 예술 공간을 세우며 사람들은 도시의 숨결을 되살렸다. 그래서 크라이스트처치 사람들은 스스로를 "Rebuild City"의 시민이라 부른다. 그들에게 이 말은 단순히 건물을 다시 세운다는 뜻이 아니라, 무너진 삶을 다시 잇고 공동체를 다시 엮어내는 일이었다.

지진의 흔적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새 건물의 냄새와 오래된 돌담의 온기가 공존하고, 무너진 성당 옆에는 예술가의 스튜디오가 들어섰다. 한때 폐허였던 공터에는 벽화와 카페가 생겨났다. 상처를 지운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힌 것이다. 리버사이드 마켓이나 롤리킨 젤라또처럼 지역 창업자들이 만든 공간은 도시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고, 벽화 프로젝트나 야외 공연, 팝업 카페는 시민 스스로 도시를 재생시키는 무대가 되었다. 관광은 '방문'에서 '참여'로 확장되었고, 도시의 일상이 곧 관광이 되었다.

그 결과 이제 크라이스트처치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회복의 과정을 예술과 일상으로 증명하는 도시가 되었다. "Rebuild City"라는 말은 더 이상 건축의 언어가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철학과 태도를 상징한다.

하지만 여행자인 내게 크라이스트처치는 '다시 세워진 도시'라기보다 '처음부터 평화로웠던 도시'처럼 느껴졌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그 속을 천천히 걸어간다. 정원에서 도시락을 먹는 가족들, 공연장을 향해 악기를 든 학생들, 마켓을 오가는 시민들의 일상은 이미 회복의 완성형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상처 위에 피어난 도시가 아니라, 회복의 방식을 예술로 증명한 도시다. 자연과 사람, 음악과 시간이 겹쳐 흐르고, 그 모든 흔적이 조용히 이어진다. 정원 위에 세워진 이 예술의 도시는 오늘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김소은

제주에서 10여년을 살다 뉴질랜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지속가능한 관광, 생태관광, 람사르습지 보전, 해양관광 자원 발굴 등과 관련한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으며, 제로웨이스트샵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대학때부터 관광경영학을 전공하였으며, 석박사 과정에서 관광경제, 마케팅, 관광객 행동 등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현) THE(Think for Human & Earth) 관광연구소 대표, 섬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