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스러진다 예술가란 이유로
무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성악가 안영재씨가 10월21일 향년 30세로 숨졌다. 2023년 3월 세종문화회관 오페라 공연에 코러스로 출연하려던 안씨는, 리허설 도중 천장에서 내려온 무대장치에 부딪혀 ‘외상에 의한 척수손상’ 진단을 받았다. 발성 능력을 잃어 성악가라는 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 남았다. 유족들은 세종문화회관과 무대감독 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장의 예술인들은 비슷한 사고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지난 9월에는 20대 무용수가 공연 중 추락해 중상을 입었다. 2018년에는 오페라 공연 리허설 중 20대 조연출이 추락해 사망했다. 이런 치명적 사건들 외에 대부분은 조용히 묻힌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고가 부지기수다. 안영재씨와 처지가 같은 예술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 여기저기에 있다는 의미다.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분야는 없다. 예술계의 소문이 흉흉한 건 사고 자체보다 이후 처리 방식 때문이다. “악기 연주가가 출퇴근하다 중상해를 입었는데 지도교수가 사업주라 은퇴를 택했다” “공연 준비 중 다쳐 책임을 묻자 ‘예술가가 나선다’라며 힐난을 들었다” 등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례들이 입에서 입으로만 떠돈다.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중대재해전문가넷)’ 공동대표 김현주 교수(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면 보통 노조나 업계 동료들이 나서는데 예술계에는 노조도 없고, 한 다리 건너면 선후배, 사제 지간으로 묶인 관계라 섣불리 이야기하지 못한다.”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어렵기에 동등하고 공식적인 계약관계를 요구하기 어렵다. 다치는 건 불운, 개인의 책임이 되기 쉽다.
공연·예술계의 안전사고 현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고용보험 가입자 외에 프리랜서 예술인, 단기계약 노동자는 추산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공연·예술 분야 대다수는 이 방식으로 일한다. 이들은 산재보험 혜택도 보지 못한다. 다치면 그날부터 바로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연·예술계는, 사고의 타격은 치명적이지만 집계되지 않는 영역이 지나치게 넓은 분야다. 김현주 교수는 “고 안영재씨 사건과 무용수 추락 사건 등을 묶어 독립적 조사 기구를 꾸리고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프리랜서 예술인이 산재보험 혜택을 볼 방법이 없지는 않다. ‘예술인 산재보험’이라는, 일반적 산재보험과 별도의 트랙이 있다. 정해진 소속 없이 단기 프로젝트에 따라 일하는, ‘산재보험 제도의 사각에 있는 예술인’을 구제하는 것이 예술인 산재보험의 본래 취지였다. 이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의무 가입인 산재보험과 달리 예술인 산재보험은 임의 가입(자율적으로 가입)인데, 가입률이 너무 낮다.
프리랜서 공연자가 예술인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이유는 많다. 모순되게도 주머니가 가볍고 사회 경험이 적은 이들일수록 포기하기 쉬운 구조다. 우선 비용 부담이 있다. 사용자가 부담하는 산재보험료와 달리 예술인 산재보험은 예술인 스스로 보험료를 내야 한다. 하장호 문화연대 문화정책위원장은 “큰 공연이라도 코러스, 단역은 회당 출연료가 낮다. 1만~2만원 보험료조차 부담스러운 이들은 보험에 선뜻 가입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보험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도 있다. 가입하려면 예술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 우선 ‘예술활동증명’을 하는 데 접수 후 약 15~20주 이상 걸린다. 표준계약서 등 각종 서류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계에서는 알음알음으로, 구두 계약으로 일하는 관행이 남아 있다. 특히 젊은 공연자는 선배나 지도교수에게 ‘공식적인’ 계약관계를 요구하기 어렵다.
사각을 없애려고 도입한 예술인 산재보험이 도리어 사각을 강화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제도가 예술인의 ‘근로자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쓰인다는 것이다. 지난 5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뮤지컬 앙상블(군무와 코러스 담당) 배우의 임금 체불 소송을 담당한 천지선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인 산재보험을 규정한 예술인 복지법을 들어 ‘예술인은 근로자가 아니며 예술인 복지법에 따라서만 보호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법적 구제를 거치면 최종적으로 승소할 수 있겠지만, 행정청이 회피하려고 들면 당장은 방법이 없다.” 예술인들을 위해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대책 역시 ‘적극적 행정’이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추진하는 전 국민 산재보험 가입은 취지가 좋지만, 법 개정은 시간이 걸리니 현 시스템 안에서라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좋아서 일하니 노동자 아니다?

법과 행정 체계뿐 아니라 ‘예술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좋아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회 전반의 인식도 벽이다. 그런데 성악가 출신인 한진만 예술인연대 사무처장은 이 선입견이 “공연·예술가 자신들에게도 있다”라고 말했다. 한 사무처장은 “특히 순수예술 분야에 있는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의 정체성’이 자리 잡다 보니, 공식적 계약 관계나 노동자로서 지위가 익숙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예술계 내부에도 권익을 찾으려 목소리 내는 것을 터부시하는 흐름이 있다. 미숙한 개인과 좁은 사회, 헐거운 사회보장 제도와 예술인에 대한 자타의 편견이 불협화음을 내는 셈이다.
공연·예술계에서는 피해 보상이나 안전교육과 더불어 근본적·장기적 해결책을 이야기한다. ‘제작 극장’이다.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해 대부분 공연장은 예술인을 직접 고용하지 않는다. 극단, 합창단, 감독에게 일정 기간 무대를 대여하는 일종의 임대 사업자다. 반면 독일을 비롯한 해외 몇몇 국가는 극장에 전속 공연자들이 있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공연·예술계의 숙원이다. 한진만 사무처장의 말이다. “매번 무대를 옮기는 지금은 밖에서 연습하고, 극장에는 리허설 때 처음 가본다. 언제든 실수가 나오고 사고가 터질 수 있다. 익숙한 환경에서 연습하면 더욱 안전해진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핵심 강점은 문화·예술의 질적 향상이다. 예술인들이 직접 극장을 운영하면서 안목을 발휘한다면 더 높은 수준의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진만 사무처장은 “아직 먼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작 극장이 보편화된다면 영화관처럼 동네 극장에 항상 공연이 올라간다. 공연장을 찾는 일이 연중행사가 아니라 평범한 여가가 된다. 문화 ‘산업’을 수출해 엄청난 수익을 내는 걸 넘어서, 순수예술 지원에 국민적 공감이 모이는 데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문화 강국 아닐까.”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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