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두 사람은 왜 서로에게만은 기적이 됐을까… 한효주의 '로맨틱 어나니머스'

2025. 11. 18.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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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신과 의사의 코멘터리]
<17>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하나·소스케
편집자주
정신건강의학과 김지용, 오동훈, 허규형 전문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우리의 마음도 진단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주인공 하나(한효주)와 소스케(오구리 슌). 둘은 각각 극심한 시선공포증과 결벽증에 시달리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중독 치료 영역에는 ‘AA(Alcoholics Anonymous)’라고 불리는 모임이 있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이라는 뜻으로,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가장 깊은 약점을 고백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회복의 여정을 함께하는 자조 모임이다. 이 모임의 핵심은 '익명성'과 '수용'이다. 내가 누구이든, 어떤 과거를 가졌든, 이곳에서는 오직 '알코올 중독자'라는 공통의 아픔으로 연결되며, 판단이나 비난 없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수용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AA'의 개념을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가져온다. 다만 이들은 알코올이 아닌, '불안'이라는 문제에 중독되어 세상을 향해 자신을 감춘 '익명'의 존재들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여자 하나와, 타인과 접촉하지 못하는 남자 소스케. 이 드라마는 각자의 불안 속에 갇혀 '익명'으로 살아가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가장 특별한 자조 모임, '로맨틱 어나니머스'를 결성하는 치유의 기록이다.


'시선'이라는 감옥: 하나의 사회불안장애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에서 시선공포증을 가진 하나는 정체를 숨긴 '익명의 쇼콜라티에'로 살아간다. 넷플릭스 제공

주인공 하나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쇼콜라티에지만,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극심한 '시선공포증'을 앓고 있다. 이는 의학적으로 '사회불안장애'에 해당한다. 핵심 진단 기준은 타인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현저하고 지속적인 공포다. 단순히 낯을 가리는 수준을 넘어, 다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사회적 상황(발표, 회의, 식사 등)에서 자신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해 창피를 당할까 봐 극심한 불안을 느낀다.

사회불안장애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생물학적 요인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는 경향성을 뜻하는 '위험 회피' 기질을 높게 타고난 경우, 혹은 불안을 조절하는 부위인 뇌 내 편도체의 과활성이나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들 수 있다. 심리적 요인으로는 어린 시절 통제적이고 비판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여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는 성향이 형성된 경우가 해당된다. 여기에 실수로 사람들에게 놀림이나 망신을 당했던 부정적인 경험이 더해지면 '사람들은 위험하고 나를 비판할 것'이라는 왜곡된 인지 도식이 형성된다.

하나는 용기 내 출전한 쇼콜라티에 대회에서 심사위원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경연장을 뛰쳐나간다. 이때 경험한 극심한 불안과 공포감은 내면에 트라우마로 작용해 '사람들의 시선은 나를 파괴한다'는 생각을 공고히 했을 것이다. 이후 그녀가 택한 '익명의 쇼콜라티에'라는 삶은, 사회불안장애의 핵심 기제인 '회피' 전략이다. 시선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타인과 마주치는 것 자체를 피함으로써 그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려는 것이다. 회피 전략은 당장의 불안을 줄여줄 수 있지만, 사람들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깨질 기회 역시 사라지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불안은 더 견고해지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된다.


'오염'이라는 족쇄: 소스케의 강박장애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에서 어릴 적 트라우마로 결벽증을 갖게 된 소스케는 반복적으로 손을 씻고 타인과 접촉을 피하는 강박행동을 보인다. 넷플릭스 제공

또 다른 주인공 소스케는 제과 기업의 후계자이자 유능한 경영자이지만, 타인과 악수조차 하지 못하는 극심한 결벽증에 시달린다. 이는 '강박장애'의 한 형태다. 강박장애의 진단은 원치 않음에도 반복적으로 침투하는 '강박사고'와, 그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반복하는 '강박행동'의 존재를 바탕으로 한다. 소스케의 경우 '타인과의 접촉은 곧 오염'이라는 강박사고가 있고, '손 씻기'나 '접촉 피하기'는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강박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강박장애 역시 복합적인 원인을 갖는다. 생물학적으로는 ‘피질-선조체-시상-피질 회로’라는 복잡한 이름의 뇌 회로 기능 이상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이 회로는 뇌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나 충동의 필터 역할을 담당하는데, 강박장애에서는 이 역할이 약화하면서 평소라면 걸러져야 할 생각이 마음속을 잠식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불안감이 악화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는 '고립'과 '취소'라는 방어기제가 강박장애의 형성에 기여한다고 본다. '고립'이란, 어떤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기억은 의식에 남겨두되, 그와 연결된 감당하기 힘든 감정만 분리해 억압하는 것을 말한다. '취소'는, 자신이 가졌던 용납 못 할 생각이나 저지른 행동을, 상징적이고 마술적인 행동을 통해 무효화하려는 시도다.

소스케에게는 어린 시절 백혈병을 앓던 형이 있었다. 입원 치료로 답답해하는 형을 위해 몰래 무균실에 들어가 사탕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형의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형을 해쳤다’는 원초적인 죄책감은 어린아이의 자아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파괴적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고립'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죄책감과 공포라는 감정은 억압하고, '접촉', '오염'이라는 비교적 다루기 쉬운 생각을 의식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동시에 '취소' 방어기제가 반복적인 손 씻기와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강박행동을 형성한다. 일견 스스로를 보호하는 듯 보이는 소스케의 강박행동은 사실은 자신으로 인한 오염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형을 해쳤던 과거의 잘못을 씻어내며, ‘다시는 나의 존재로 인해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려는 마술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


안전한 치료 환경이 되어준 서로의 불안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에서 하나와 소스케는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만큼은 그동안의 불안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넷플릭스 제공

사회불안장애와 강박장애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점진적 노출 및 반응 방지'다. 이는 환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이나 상황에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되 불안을 낮추기 위해 하던 행동(회피나 강박행동)을 하지 않고 버티게 함으로써, 걱정했던 재앙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훈련이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상황에 노출시키면 불안이 크게 자극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환자가 수월하게 느낄 만한, 비교적 편안한 대상에 대한 노출이 치료의 첫 단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하나와 소스케는 서로의 문제를 치료하는 데 좋은 시작점이 되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그동안의 불안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예외적인 상대였기 때문이다. 첫 만남부터 하나는 소스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소스케는 하나와의 접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에 개연성을 부여하려는 드라마적 서사지만, 심리적인 관점에서는 그들 각자가 지닌 불안이 역설적으로 상대방에게 가장 안전한 환경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를 평가하고 비웃는' 자신감 넘치고 우월한 타인의 시선이다. 하지만 소스케는 그 자신도 불안에 휩싸여 있기에, 그런 오만한 시선을 보낼 수 없는 존재다. 소스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염'이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침범'이다. 하지만 타인을 마주치지 못하고 잔뜩 움츠러든 하나는, 그에게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처럼 상처받기 쉬운, 세상의 '무해한'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이 지닌 마음의 방어벽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깊어지며 '교정적 정서 체험'의 단계로 나아간다. 정신과 의사 프란츠 알렉산더가 제시한 개념으로, 두려움을 유발하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새롭고 안전한 관계 안에서 정서적으로 '다시 경험'하되, 이번에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결말로 끝맺는 치유적 경험을 말한다. 서로의 존재를 통해 "아, 타인과 가깝게 지내는 게 안전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나아가 “타인과 함께일 때 내가 더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경험하는 재학습 과정인 셈이다. 기차 안에서 잠든 하나가 소스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소스케가 이를 피하는 대신 자신 역시 하나에게 살며시 기대는 장면은 기존의 신념이 깨지고 '접촉은 연결과 위로'라는 새로운 경험이 각인되는 순간이다. 그는 통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용기 있는 연결을 통해서도 세상을 감당할 수 있음을 배우기 시작한다.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에서 하나가 초콜릿 가게 '르 소베르'의 홀서빙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 넷플릭스 제공

진료를 하다 보면, 과거 관계에서 받은 상처에 갇혀 새로운 관계 맺기 자체를 두려워하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또다시 상처받을까 봐', '나의 이상한 모습을 들키면 결국 떠나갈까 봐' 두려워하며, '익명'의 가면 뒤에 자신을 숨기고 안전한 고립을 택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회피는 당장의 불안은 줄여줄지 몰라도, 결국 스스로를 과거의 상처 속에 영원히 머무르게 할 뿐이다.

하나와 소스케가 서로에게 기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각자의 극심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초콜릿 가게'라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는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정적 정서 체험'은 혼자만의 다짐이나 노력을 넘어, 결국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상처를 완벽히 이해해 줄 누군가를 마냥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또다시 상처받을 두려움을 딛고서라도 한 걸음 나아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보려는 용기다. 그 용기 있는 시도만이 우리를 '익명'의 가면 뒤에서 벗어나게 하고, 벽을 넘어 진짜 인생의 무대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오동훈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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