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11)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일본 유학생- 신학문 배운 지역출신 유학생들 항일운동 조직

김명식 기자 2025. 11. 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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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비밀결사 성진회 지원 등
학생독립운동 토대 구축 ·내연 확대
이경채·장석천·장재성 등 주요 인물
광주발 학생 항일 전국적 확대 추진도

일본 내 유학생 조직 연계 동조 집회
동경광주유학생들 가장 먼저 적극 대응
퇴학 130여명 일본 학교에서도 항일
"학생 항일운동 1930-40년대도 지속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경채, 장석천, 장재성을 비롯한 지역출신 일본 유학생이 운동 발발 전후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를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 토대를 구축한 영향을 받았다. 사진은 3일 열린 제96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식 모습./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발생해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중국과 일본의 조선인 사회까지 확산되면서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와 광주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 등 광주지역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은 서울, 영남, 경기, 충청, 강원, 평양, 해주, 함경도 등 전국의 각지로 그 열기가 퍼져나갔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에 거주하는 해외 한인의 지지를 받았다.

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소강상태에 빠졌던 한민족 독립 의지를 재확인 시켜준 전국적이면서도 세계적 차원의 독립운동이었다. 규모 면에서도 3ㆍ1운동 이후 가장 큰 대중운동이었다. 운동의 주체가 학생이었으나 학내문제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교육문제, 일제 식민통치문제, 민족해방 등을 제기한 총체적 민족운동이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 등 해외 한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모국을 떠나있는 한민족들이 '자주 독립국가 수립' 염원으로 상호 연계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발발전후 일본 유학생 큰 역할

학생독립운동은 발발 전후로 일본 유학생(유학생)들과 밀접한 관련 있다. 일본 유학생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 토대를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운동 후에는 일본 내의 연계망을 통해 지지 선언 등이 나왔다. 이경채와 장석천, 장재성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광산구 송정동 출신의 이경채는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경채 삐라사건'의 당사자다. 1925년 광주고보 3학년 재학시부터 독서회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1928년 재학중 '조선독립선언문'등 격문을 유인하여 살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학교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게 되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5개월간에 걸친 동맹휴학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이경채 빠리 사건'이다.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그는 출소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재학하면서 광주고보 출신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금되자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한 후 중국군으로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이렇게 조선, 일본, 중국 등 세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일제 감시를 피해 이름도 세 번 바꿨다.

장석천은 완도 출신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192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4개월만에 중퇴하고 같은 해 7월에 귀향한다. 그후 광주학생독립운동 뿌리인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를 지원했다. 1928년 12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임명되는 등 사회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장재성·박오봉·강석원·국채진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투쟁을 지원했다. 아울러 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등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를 담당했다.
제96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지난 3일 광주 서구 화정동 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서 제96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학생의 날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 전국 및 해외까지 열기 확산

1929년 11월 광주에서 학생들의 항일 시위가 발생하자 이에 호응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된다. 일본의 동경유학생학우회도 이 소식을 접하고 12월 14일 동경기독회관에서 '광주학생사건비판연설회'를 개최했다. 황규섭의 개회사, 박용해·이정욱 진상보고를 했다. 이어 채강호,이산매월, 송태도 등 수 명이 일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진행했다. 이 행사로 간부 4명이 일경에 검속됐다. 동경에서는 12월 24일에도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과 연대해 광주학생들을 지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박경식, 1991).

와세다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생하자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이 총회를 통해 '광주학생사건대책협의회' 설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했다. 조선의 현황에 대해 연구회와 토론회, 웅변대회 등을 개최하여 광주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일제의 만행을 비판했다(와세다대우리동창회 편, 1976:82-83).

11월 24일 광주유학생회 동경지부 학생들도 간담회를 개최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경은 1930년 2월 23일 동경유학생졸업생 축하연회를 해산시키고, 주요 유학생들이 동계방학에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동경지역 광주유학생들이 가장 먼저 광주의 소식을 알고 적극적으로 대응 한 것은 동경 유학생 출신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장재성과 관련이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장재성은 1926년 광주고보 재학 시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진회를 결성해 광주학생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1929년 동경에 있는 중앙대학으로 유학을 가 '신흥과학연구회' '광주유학생회' '동경학우회' 등에서 활동을 하던 그는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하기 3개월 전에 광주로 돌아와 후배들을 지도하며 조직화하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발생 시에는 중심에서 활동했다. 이후 주동자로 검거되어 수감자중 최고형이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다시 중앙대학으로 도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장재성이 동경학우회와 동경광주유학생회 등과 지속적인 연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체된 민족운동 발전 전환점 평가

이처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과시한 것은 물론, 유학생을 비롯한 해외 한인사회가 단합하고 민족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 1930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현지 민족운동가들을 고무시켰다. 나아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상당수가 1930년대 청년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 등에 투신하여 민족운동을 지속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1920년대에서 193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일어난 민족운동 발전의 전환점이자 분수령으로서 크 의미를 지닌 셈이다.

특히 당시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학생 중 130여명(전국)은 교토 양양중학교 등 일본 사립학교로 진학 한 뒤 차별대우에 항의하면서 동맹휴학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이 일본까지 가서 항일운동을 계속한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오래기간 연구해 온 김재기 전남대 교수는 "1929년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독립운동은 동경 유학생들이 참가한 1919년 2·8 독립선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10-20년에 일본에서 신흥과학을 배우고 돌아 온 조선 청년들이 항일운동 조직을 조직하고 내연을 확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들이었다. 특히 삼엄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일제 심장부에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 졌다"고 강조했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임지섭 기자 ljs@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