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교과서로 급하게 달린 한국, 싱가포르 ‘AI 교실’은 다르게 갔다

“인공지능(AI) 세계에서 우리는 성냥불을 쥔 사람들입니다. 이 특별한 힘을 점화시킬 주체는 바로 우리입니다. 진짜 도전은 인공지능 사용여부가 아닙니다. ‘어떻게 전략적으로 이 힘을 활용해 교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진정한 자기 주도 학습 세대를 키울 것인가’입니다.”
5∼6일(현지시각)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0회 에듀테크 아시아(Edutech Asia) 행사 첫날, 에이다 첸 싱가포르 만주슈리중등학교 교육기술 담당 부장의 말이다. 아시아 최고 에듀테크(교육기술) 콘퍼런스이자 전시회인 이곳에서 아시아·태평양 교사들과 정부 및 교육 엔지오(NGO) 관계자, 에듀테크 기업 관계자 8000여명이 모여 첨단 기술을 사용한 교육을 토론했다.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가 등장한 지 3주년이 된 올해 토론 주제 대다수는 단연 인공지능과 교육이었다. 참석자들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교수법을 논의하는 한편, 인공지능 활용에 대한 학교 정책, 교실 내 인공지능 사용, 인공지능 리터러시와 윤리 교육 등 현장의 고민과 사례를 공유했다.
인공지능으로 미술 수업…토론 사고 과정 추적도
연단에 선 싱가포르 교사들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다양한 수업 사례를 소개했다. 캔디스 리 만주슈리중등학교 미술과 수석교사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미술 수업을 소개했다. 그림 구상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인공지능에 프롬프트(지시어)를 입력해 1차 시각물을 만들게 한 뒤, 생성된 이미지와 자신의 의도를 비교·분석하고 동료 피드백을 거쳐 최종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그는 다양한 스타일로 완성된 학생의 작품들을 소개하며 “인공지능이 학생의 창의성을 제한해 작품이 비슷해진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인공지능을 종착역이 아닌 출발점으로 삼아 학생들이 창의성의 장벽을 돌파하도록 도왔다”고 했다.
같은 학교 팅 콕 티암 교사는 싱가포르 교육부의 디지털 플랫폼 ‘학생 학습 공간’(SLS)이 제공하는 인공지능 도구를 사용해 수학 수업을 진행한 사례를 공유했다. 학생이 수학 문제를 풀면 인공지능이 정답 여부와 근거를 제시하고, 교사는 이를 토대로 학생의 취약 개념을 파악해 다음 수업에 반영하는 식이다.
쿠앙 웬 찬 싱가포르 래플스고등학교 교육기술부장은 사회문제 토론 수업에 인공지능을 활용한 경험을 전했다. 그는 학생의 동의를 얻어 조별 토론 내용을 녹음한 뒤, 인공지능이 요약한 내용을 통해 학생들의 사고 과정을 추적하고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

실패한 인공지능 교과서 정책…싱가포르에서 배울 것은
치아 하이시앙 싱가포르 교육부 에드테크 수석전문관은 “싱가포르 교육부는 인공지능 도구가 단순히 생산성을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학습을 실제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목표를 확실히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인공지능 도구를 수업에 도입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과제를 손으로 직접 쓰게 하는 등 아날로그 도구를 혼합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웠다. 의도적인 마찰을 만들어 인지 기능의 인공지능 의존을 방지하려는 것”이라며 “반면 교사들의 행정 업무 중 인공지능으로 자동화할 수 있는 부분은 과감히 자동화시켰다”고 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의 이주호 전 교육부 장관은 2023년 6월 인공지능 교과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뒤 1년 반이 지난 올해, 시범 도입 없이 학교 현장에 인공지능 교과서를 보급했다. 애초 모든 학교에 도입하려고 했으나 반대 여론에 부딪혀 시행 첫해인 올해 희망 학교에만 도입했다. 여기에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뒤인 지난 8월 국회는 인공지능 교과서를 교육자료로 규정해, 인공지능 교과서 정책은 사실상 폐기됐다. 인공지능 교과서의 목표와 효과에 대한 공감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정책을 추진한 것이 실패로 이어진 것이다.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의 도입률도 올해 1학기 37%에서 2학기 19%로 하락했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모두를 위한 인공지능(AI) 인재양성’이라는 제목의 인공지능 교육 정책을 발표했으나, 이 역시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수립됐다기보다는 인공지능 인재 육성 정책을 종합한 수준이다.
인공지능 도구를 이용한 교육자료를 활용하는 방식도 훨씬 유연하고 개방적이었다. 싱가포르는 검정 심사가 필요해 최신 기술이 업데이트되기 어렵고 활용 방법도 경직된 교과서 방식이 아니라, 정부에서 관리하는 디지털 교육자료 플랫폼에서 제공되는 인공지능 도구를 수업에 활용하도록 하는 형태로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교사들의 공감대를 얻기 위해 가이드라인도 세밀하게 마련했다. 싱가포르 교육부는 인공지능 교육과 관련한 윤리 지침을 수립해 교육용으로 허용된 인공지능 도구의 화이트리스트(허가 목록)을 명확히 제시했다. 또한 일회성 교사 연수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교사 90%가 참여하는 온라인 인공지능 학습 공동체도 운영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의심하라…비판적 문해력 교육도
인공지능과 관련한 윤리 교육 사례도 공유됐다. 리처드 버킬 태국 럭비스쿨 디지털학습국장은 “전교생 집회 시간에 교장이 ‘매일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딥페이크(이미지·음성 합성 기술) 영상을 틀었다. 어린 학생들은 신나서 난리가 났다”며 “이때 우리는 이 영상이 딥페이크임을 알린 다음 ‘딥페이크 대상이 너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어진 개별 수업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인공지능 윤리를 가르쳤다”고 했다.

학생들을 유해한 디지털 환경에서 보호하기 위해 학생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안전망을 구축한 사례도 소개됐다. 리처드 버킬 국장은 “학생기술팀에 속한 학생들이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속어를 교사에게 알려주면, 이를 구글의 ‘부적절한 콘텐츠 탐지’ 기능에 추가해 학교 내 메일과 채팅에서 걸러내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 과정에서 교사들이 놓칠 수 있는 디지털 위험 실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한 여학생은 ‘매일 스냅챗에서 누군가 발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이런 방식은 학교 내 디지털 관련 정책을 만들 때 참고가 될 뿐 아니라, 학생이 디지털 공간에서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로도 이어진다”고 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싱가포르/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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