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포기했던 ‘삼각뿔’ 다시 오르다

니옹, 글랑, 로잔, 브베, 몽트뢰…. 몇개의 이름과 함께 기억하는 호수가 있다. 그 호수는 끝도 없이 크고 넓어서 때때로 오래된 바다처럼 다가온다. 사면이 산으로 에워싸인 이 나라에서 이 호수의 존재는 바다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스위스의 ‘레만호’다. ‘제네바호’로도 불리는 레만호는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 일대에 걸쳐 있다. 알프스 산지 최대 규모 호수로 길이가 무려 72㎞, 너비는 장장 14㎞에 달한다. 앞서 나열한 이름은 레만호를 둘러싼 작은 마을들이다. 이 마을들을 따라 스위스 제네바를 오가는 기차의 선로가 이어진다.



그동안 산을 오른 지도 꽤 긴 세월이 흐른 만큼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를 여행할 기회도 적지 않았다. 먼저 ‘투르 뒤 몽블랑’(TMB) 종주와 ‘울트라트레일 뒤 몽블랑’(UTMB) 100㎞ 경기를 꼽을 수 있다. 몽블랑 산군을 가운데 두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위스의 국경을 넘는 두번의 모험을 통해 스위스 땅을 밟은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낌은 ‘따스함’이었다. 드높은 산 위에 아기자기하게 지어 올린 전통가옥, 목에 묵직한 워낭을 달고 평화로운 초원 위에서 느긋하게 풀 뜯는 젖소 무리를 보고 있으면 가야 할 길 앞에서 급급하던 마음도 차분해졌다.


하지만 스위스와 내가 가장 강렬하게 만난 때는 2014년 여름이 아닐까 싶다. 10년도 더 된 시간을 회귀하는 심정으로 돌아보니 거대한 산 하나가 떠올랐다. 삼각뿔 모양의 독특한 산세가 마음을 사로잡는 산, 스위스 여행 기념품으로 유명한 토블론 초콜릿의 모티브가 된 산, 이런 이유로 등반가는 물론 여행자 사이에서도 스위스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할 명소로 손꼽히는 산, 이름도 웅장한 ‘마터호른’이다.
마터호른은 2014년 여름, 내가 알프스 원정대에 합류해 스위스에 첫발을 디딘 그 시절 내 마음을 뒤흔든 산이다. 당시 폭설로 자일이나 피켈은 배낭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해발 4478m의 마터호른 정상 등반이 소기의 목적이었으나 원정 기간은 정해져 있었고 날씨는 도와주지 않았다. 앞서 소화한 몽블랑 원정 일정에 체력은 고갈되고 지쳐 있었다. 결국 욕심을 내려놓고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숙소에서 심신을 회복하며 나흘을 보냈다. 예산이 빠듯한 가난한 원정대한테 스위스는 친절한 나라가 아니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따로 챙겨 끼니를 해결하던 나날이었다. 그래도 마터호른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배고픈 줄 몰랐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회상하는 아련한 내 표정이 차창에 비쳤다. 2025년 8월, 제네바에서 체어마트(체르마트)로 향하는 기차는 그때처럼 레만호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예의 그 아름다운 작은 마을들을 지날 때마다 분주하게 셔터를 눌러댔다. 모든 것이 좋았다. 레만호의 아침을 보고 싶어서 제네바공항에서 밤을 지새우고 새벽 첫 기차를 탄 나다. 윤슬이 빛나는 호수 위로 다시 만날 마터호른을 그렸다. 차창 밖 레만호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느덧 푸른 들판이 누워 있었다. 한동안 같은 풍경 속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11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덧 피스프에 도착했다. 피스프는 마터호른의 고장 체어마트로 향하는 산악열차의 환승역이다. 4량 정도 되는 자그마한 산악열차가 탑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11년 전에도 이 열차를 타고 마터호른으로 향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나를 그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공교롭게도 지금 메고 있는 60리터짜리 빨간 배낭 또한 당시 원정 때 쓰던 배낭이었다.
배낭에는 이제 자일이나 피켈은 없었다. 대신 산을 달릴 때 필요한 트레일러닝용 배낭과 러닝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와 텐트가 들어 있었다. 이번 여정의 중심에 ‘캠핑’이 있었다. ‘나홀로 캠핑’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연 속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어서였다. 물론 하룻밤에 30만원을 호가하는 스위스 호텔의 살인적인 요금도 한몫했다.

구불구불한 산간 지대를 통과한 산악열차는 약 40분 뒤 체어마트에 도착했다. 캠핑장부터 찾아갔다. 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자리한, 체어마트 유일의 캠핑장이었다. 예약을 하지 못해 불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눈웃음이 인상적인 현지 여성이 나를 환영했다. 그는 응당 예약 여부를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행이 있냐고 물었다. “저 혼자예요!” 자신 있게 대답한 데는 이유가 있다. 1인 여행자의 경우 현장·당일 예약을 해도 캠핑 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는 이용 후기를 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때는 8월, 알프스 트레킹과 등반 성수기인 만큼 캠핑 사이트는 전세계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적하고 조용해서 명당에 속하는 가장자리는 이미 만원. 어쩔 수 없이 캠핑장 한가운데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3박4일 동안 묵을 나의 보금자리였다. 우왕좌왕했지만 그래도 처음치곤 훌륭하게 나만의 집을 완성했다. 순간 엄청난 뿌듯함이 몰려왔다. 겨우 1인용 텐트 한동 쳤을 뿐인데 마치 내 삶을 내가 주도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 광장으로 갔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11년 전 원정 당시 발길이 머물던 추억의 장소들이었다. 역 앞의 슈퍼마켓도, 기념품 상점도, 등산용품점도, 서점도, 젤라토 가게도, 방앗간처럼 들렀던 햄버거 매장도 그대로 같은 자리에 있었다. 문득 체어마트 시내를 배회하던 그 시절 나와 원정 동료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지금보다 어렸고, 그래서 어리숙하고 촌스러웠던 우리. 감개무량했다.


정처 없이 체어마트 시내를 배회했다. 낯이 익은 골목이 보이면 주저 없이 들어섰다. 이 작은 산간 마을에서 길을 잃을 염려 또한 없을 테니 걱정도 없었다. 교회 뒤편의 개천을 따라 얼마간 걷자 오르막길이 보였다. ‘저곳은 설마….’ 궁금하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찾았다. 우리가 나흘간 창문으로 마터호른을 바라봤던 유스호스텔 가는 길이었다. 투숙객을 가장하고 잠시 들어간 유스호스텔 또한 그대로였다.
왜 그때는 그렇게 모든 것이 크고 높고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졌을까. 그날 밤, 정수리까지 바짝 끌어 올린 침낭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옛날 일을 생각했다. 캠핑 사이트는 진작부터 조용했다. 산에서 한나절을 보낸 사람들이니 어지간히 피곤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사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났다. 내 한 몸 겨우 누인 좁은 텐트 속에서 나는 왠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듯했다.

한기에 소스라치게 깼다가 겨우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니 아침이 찾아왔다. 이튿날에는 마터호른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서둘러 길을 나섰다. 체어마트 시내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마터호른 트레일을 따라 해발 3260m 회른리 산장으로 향했다. 마터호른 아래 장난감처럼 보이는 작은 집, 회른리 산장은 마터호른 트레킹의 종착점인 동시에 시작점이다. 산장까지의 거리는 13㎞, 체어마트가 해발 1620m 고지에 있으니 약 1640m의 고도를 올라가야 했다.
길은 초행인 듯 낯설기도 했고, 이전에 올랐던 듯 익숙하기도 했다. 혼돈 속에서 이런저런 추측만 해댈 뿐 산장에 이르기까지는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가며 말없이 산길에 올랐다. 어느새 수목한계선을 넘은 나무의 키는 점점 작아졌다. 산은 황량해졌다. 개미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적요한 곳인데도 신기하게 저 멀리 능선 계곡 을 오르는 사람이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되고 외로운 산속에서 그들은 거의 유일한 나의 희망이었다. 과연 저기까지 갈 수 있을지, 가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어도 앞서 오른 사람을 보면 쉽게 멈추거나 돌아설 수 없다.


가까스로 닿은 능선에서 거친 암벽 구간을 지나 수직으로 치솟은 길을 얼마간 오른 뒤에야 회른리 산장에 도착했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회른리 산장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초연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렇다면 원정 당시 가까스로 찾아간 산장에서 동전을 털어 커피 한잔을 마신 그곳은 어디란 말인가. 한낱 꿈이었을까. 산장 안내문을 읽어보니 2015년에 리모델링을 했다고 한다. 1년 사이 모습을 바꾼 것일까? 그날의 진실은 마터호른만 알고 있겠지만 어느새 몰려든 구름 속에 숨어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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