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상을 받아들일 용기

한겨레21 2025. 11. 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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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엄마가 암 진단을 받았다. 위암이란다. 다행히도 국가건강검진에서 발견돼 ‘조기 위암’으로 판정됐다. 가족은 ‘조기’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마는 곧바로 치료를 시작했다. 먼저, 침윤 범위가 크지 않다는 초기 소견에 따라 내시경 절제술을 받았다. 입속으로 내시경을 넣어 종양을 떼어내는 시술이다. 놀라울 만큼 간단한 작업이었다. “아니, 암이 이렇게 쉽게 치료된다고?” 가족 모두 의학의 발전에 감복했다.

엄마의 암 진단으로 바뀐 가족사

2주 뒤 조직검사 결과는 심부 절제연에 암세포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깨끗이 떼낸 줄 알았는데 아래쪽에 찌꺼기가 남았다고 했다. 잠시 실망했지만, 엄마는 위의 아래쪽 50%를 추가 절제하고 주변 림프샘까지 일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일벌백계’식 치료법이었다. 다행히 수술은 배를 열지 않는 복강경으로 충분했다.

이번엔 온 가족이 모였다. 수술 뒤, “느낌이 어때요?”라고 내가 묻자, 엄마는 “칼에 찔린 기분?”이라며 웃었다. 엄마는 닷새 만에 퇴원했다. 머지않아 조직검사 결과가 다시 나오면 엄마의 위암이 1기일지, 2기일지 결정된다. 1기이면 이대로 추적 관리만 하면 되고, 2기이면 항암치료를 하게 된다. 가족 모두 가벼운 결과가 나오길 바라지만, 더 중요한 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진단과 그에 맞는 치료일 것이다.

진단은 단순히 상태를 규정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의 궤적, 나아가 가족의 역사를 바꾸는 일이다. 사실 나도 살면서 큰 진단을 두 번 겪었다. 다섯 살 때 받은 시각장애 판정과, 서른 중반에 받은 스티클러증후군 확진이 그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한 종합병원에서 의사가 엄마에게 말했다. “1급입니다.” 평생 아들이 유의미한 시각 없이 살아갈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이미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받아본 뒤라 엄마의 마음은 담담했다. 석 달 후 나는 맹학교에 입학했다.

나야 너무 어려서 새로운 삶이랄 것도 없이, 그냥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면 되었다. 부모의 입장은 달랐다. 맹학교 근처로 이사하고, 때 되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몇 번의 수술을 더 받게 했다. 그리고 아주 자주 글을 읽어줬다. 내 귓가에는 지금도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성경 구절이며 신문 기사며 책을 읽어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맴돈다. 그 덕에 나는 교사가 되었고, 대학원에 갔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내 시각장애 원인을 알고 나서

결혼할 즈음에 받은 스티클러증후군 진단은 조금 더 특별했다. 비로소 나는 평생 안고 살아온 시각장애가 12번 염색체의 변이 때문임을 알게 됐다. 부모는 평생의 미스터리를 풀어서 홀가분해 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분석적 효용을 위해서라면 굳이 진단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진단은 우리 부부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내 장애의 원인이 새롭게 규명됨에 따라 우리의 임신 계획이 바뀌었다. 아내는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스티클러증후군은 국가적으로 희귀질환으로 분류돼, 시험관 시술로 해당 유전적 결함을 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아내 몸에 극도의 무리를 가하는 과정이었지만, 그 덕에 우리 부부에겐 감사하게도 병리적 요인이 없는 건강한 아들이 찾아왔다.

엄마의 암 진단도, 내 시각장애와 관련된 두 차례의 진단도 모두 ‘새로운 정상’(new normal)을 여는 시작점이었다. 아예 가슴 철렁한 진단을 받을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 그리 온순할 리가 없다. 그래서 ‘진단 없는 삶’을 꿈꾸기보단 언제든 새로운 정상을 기꺼이 받아들일 유연성을 지니면 좋겠다. 그 유연성은 달리 말하면 다른 삶을 받아들일 용기다. 진단은 의료진 손에 달렸지만, 새로운 정상에 적응하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우리 몫이다.

김헌용 신명중 교사·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인 김헌용 시각장애인 교사가 노땡큐 새 필진으로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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