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녀’는 아내의 언니…길 잃은 18곡의 연가 [.txt]
23살 드보르자크, 첫사랑 요세피나에 실연
사랑의 상처 담은 연가곡집 ‘사이프러스’
예순에 완성한 아리아에도 첫사랑의 선율이

같이 들을 클래식
안토닌 드보르자크, 오페라 ‘루살카’ Op. 114 1막. ‘달에게 보내는 노래’(O Silver Moon)
나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을까?
첫사랑은 또한 어설픈 혼잣말, 즉 짝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일방적인 감정으로 도배된 짝사랑은 예술가에겐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영감의 우물이 됩니다. 예술가의 일기장 단골 소재로도 딱이니 말이죠. 짝사랑에 아파하고 쩔쩔매며 수많은 말줄임표와 느낌표로 채워간 일기장, 그것들을 꺼내 보는 일이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있었어요.
모차르트와 하이든, 그리고 드보르자크. 그들은 사랑하는 여성의 언니나 동생과 결혼했기에, 그 일기장을 숨겨야 했습니다. 음악가에게 그 일기장은 바로 악보입니다. 모차르트는 소프라노 알로이지아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댔지만, 모차르트는 확실한 한 방이 없는, 촌 동네 잘츠부르크의 음악가였죠. 그녀가 보기에 모차르트는 빈의 궁정악단의 요직을 꿰찰 가능성이 적은, 그저 철없는 음악 천재로 보였던 것이죠. 모차르트는 떠나버린 알로이지아 대신,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해요. 불과 20년 전, 모차르트가 존경하던 하이든이 그랬던 것처럼요.
하이든은 테레제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테레제의 언니인 안나와 결혼합니다. 결혼 생활은 역사에 남을 만큼 불행했어요. 부부는 결국 헤어지지 못한 채 고통받으며 죽을 때까지 40년간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죠.
영화 ‘건축학개론’의 승민은 용기를 내 서연에게 이야기합니다. “첫눈 오는 날 뭐 해?…” 평범해 보이는 이 짧은 문장은 한 남자의 수줍은 ‘고백’입니다. 드보르자크가 첫사랑 요세피나에게 어디까지 용기를 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대답이 희미했던 요세피나에 대한 휘몰아치는 사랑은 드보르자크의 펜촉을 통해 악보로 남게 됩니다.
요세피나는 예쁜데다 연극 무대에서 최고 인기 배우였습니다. 그는 요세피나를 향한 사랑으로 애간장이 타들어 갔어요. 드보르자크의 이 마음은 일기장이 아닌 연가곡집 ‘사이프러스’라는 악보로 탄생합니다.
사랑에 빠진 스물넷 청년 드보르자크는 1865년 7월, 18일 동안 매일 하루에 한곡씩 18개의 노래를 써냅니다. 만약 사랑에 빠져 행복했다면 18곡까지 쓰지는 않았겠지요. 요세피나에게 거절당한 마음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난 드보르자크를 곧장 오선지 앞으로 끌어당겼어요. 그야말로 끝도 없이 음표가 쏟아져 나온 것이죠. 전하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꾹꾹 눌러쓴 음표들이 애처로워요.
드보르자크는 8년 뒤인 1873년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며 응원해준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해요. 안나는 요세피나의 동생이에요. 자매가 닮은 듯하죠? 보석 세공업자로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안나의 아버지는 결혼에 반대하며 지참금을 주지 않았고, 안나는 상속권마저 포기한 채 작은 아파트에서 드보르자크와 신혼살림을 차려요. 결혼 4개월 후, 안나는 첫아들을 낳아요. 드보르자크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요. 드보르자크의 예술성을 알아본 안나는 평안한 가정을 이끌었고, 그녀는 거장 드보르자크의 아내로 역사에 남았네요.
요세피나를 향한 미련 가득한 18곡의 러브 송(Love Song)은 이후 현악 4중주, 오페라, 피아노곡, 가곡집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요. 미련이 남은 드보르자크가 평생 미련스럽게 꾸역꾸역 ‘사이프러스’ 가곡집을 열어 본 것이죠. 마치 지난 일기장을 들춰 보듯이요. ‘사이프러스’의 선율 조각은 당시 작곡한 교향곡 1번과 2번에도 등장하더니, 안나와 결혼하기 1년 전인 1872년, 피아노 모음곡 ‘실루엣’의 12곡으로 재편해요. 그리고 16년 후(1881년)에는 여러 가곡집으로 구성합니다. 그 사랑을 영원히 남겨 두기 위해, 그렇게 조각조각 나눠 자신의 작품집 속에 스미게 둔 것이겠죠. 1887년 12곡으로 출판한 현악 4중주 ‘사이프러스’는 원래 제목이 ‘사랑의 메아리’였어요. 드보르자크의 가슴을 찢어지게 한 그 사랑이 실루엣과 메아리가 되어 22년이 지난 후에도 드보르자크의 가슴을 적신 걸까요?
1900년, 예순이 된 드보르자크는 말년의 명작 오페라 ‘루살카’를 완성합니다. 오페라의 1막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아리아 ‘달에게 보내는 노래’는 누구나 한번 들으면 기억하는 대표 아리아인데요. 물의 요정 루살카가 왕자님을 애타게 찾으며 부르는 노래예요.
“친애하는 달님, 왕자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루살카의 이 애절한 노래는 바로 드보르자크가 첫사랑 요세피나로부터 버림받고 작곡한 ‘사이프러스’ 중 제11곡 ‘My heart is often in pain’(내 가슴은 찢어지고) 선율의 조각들을 그대로 가져다 넣어서 만들었어요. 당시 요세피나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였지요.
‘사이프러스’의 제11곡에서 어둠 속에서 흐느낄 수밖에 없었던, 사랑을 보내 줘야만 하는 그 번뇌의 감정이 오롯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조금씩 아름답고 환한 빛이 비춥니다. 이제 이 빛과 같은 요세피나의 선율의 조각이 루살카의 아리아로 재현됩니다.
드보르자크에게 ‘사이프러스’는 요세피나였어요. 그가 요세피나의 사랑에 고뇌하며 썼던 그 선율의 조각은 루살카의 애절한 노래에 영원히 박제됩니다. 드보르자크의 첫사랑은 ‘사이프러스’와 ‘루살카’로 드보르자크의 작품 목록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이렇듯 애타는 첫사랑은 애인에서 가족으로 그리고 영원한 뮤즈가 됩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흘러갈 때가 있지요. 그런 내 선택을 믿어 주고 감사하며 살다 보면 그것이 미련을 가장 최소화한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미련 없는 선택은 없을 테니.
찬 바람에 몸이 시리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영화. ‘눈이 올까 말까?’ 하다가 드디어 첫눈이 내리면 ‘건축학개론’을 틀어 놔야겠어요.
안인모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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