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음악은 차갑고 맑은 물" 민족의식 고취한 시벨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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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사람은 늘 의미를 찾는 존재다. 이유를 알지 못하면 답답하고 불안하다. 항상 질문하는 존재.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위대하다.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나은 점이 바로 질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과학이 답을 주지만 과학 이전의 시대에 세상의 기원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신화였다. 어느 민족이나 세상이 만들어진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세기 핀란드에서 창조 신화가 민족의식 형성에 미쳤던 영향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다. 1849년 문헌학자 엘리아스 뢴로트가 핀란드에서 구전되던 민담들을 채록해서 집대성한 대서사시 ‘칼레발라’가 출판된 후, 핀란드 국민 사이에서 민족의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영웅의 나라’라는 뜻의 칼레발라에는 영웅들의 모험담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오며 자존감을 상실했던 핀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로 이 불가사의한 영웅들의 후예라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시벨리우스에게 영감을 준 핀란드 영웅 대서사시 ‘칼레발라’. [사진 사회평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19/joongangsunday/20251119083647101aifx.jpg)
시벨리우스가 받은 영감의 원천도 바로 칼레발라였다. 그가 특별히 애국심을 자극하는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다. 16세기부터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에서는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소수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시벨리우스는 비록 가난하기는 했어도 대대로 스웨덴어로 소통하는 엘리트 계층 출신이었다. 그에게 민족적 자각이 일어난 것은 민족주의 운동인 페노마니아를 이끌었던 예르네펠트 집안의 아이노 예르네펠트와 사랑에 빠지면서부터였다.
민족의식이 싹트고 나니 작곡의 목적과 방향도 분명해졌다. 25살, 국비 장학금을 받고 떠난 빈 유학 생활 내내 그는 주문을 외우듯 웅장하면서도 어딘가 우울한 느낌으로 단조롭게 반복되는 칼라벨라의 낭송 형식에 푹 빠져들었다. 고대 게르만족이 쓰던 룬 문자의 고풍스러운 강약 4보격. 그는 이것이 원초적이고 순수할 뿐 아니라 가장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5분의 4박자 낭송 방식은 시벨리우스 양식의 핵심이 된 ‘핀란드’ 선율 패턴으로 재탄생했으며, 그의 음악 인생도 이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1세에 국민 예술가 등극해 연금 생활
그 후 시벨리우스는 칼라벨라에 바탕을 둔 대작들을 쏟아낸다. 첫 작품은 ‘쿨레르보 교향곡’으로, 칼라벨라에 등장하는 불운의 노예 ‘쿨레르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교향곡의 외형을 띄고 있지만, 그는 칸타타에서나 볼 수 있는 서사시의 낭송과 오페라식의 독백과 대화를 결합시킴으로써 일종의 종합예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새내기 작곡가의 미숙함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무딘 리듬과 강박적인 오스티나토, 긴 페달 포인트 그리고 서사적인 선율들이 빚어내는 어둡고 음울한 질감의 독창성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어 작업한 ‘배의 건조’ ‘투오넬라의 백조’ ‘레민케이넨의 귀환’, 오페라 ‘탑 속의 처녀’ 역시 소재는 모두 칼라벨라에서 가져왔다. 완벽주의자로 자기검열에 철저했던 시벨리우스가 이 곡들의 일부를 폐기하거나 아예 출판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시벨리우스는 이미 31살에 국민 예술가로 인정을 받았고 국가로부터 3000마르크의 연금을 지급받기 시작했다.
민족적 예술을 지향하는 인물답게 그는 정치적인 발언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1898년 핀란드 총독으로 임명된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신문을 폐간하고 반대자를 강제 추방하는 등 핀란드의 자치권을 박탈하자, 시벨리우스는 저항의 선봉에 섰다. 보브리코프 총독이 헬싱키 광장에서 암살당할 때까지 불타올랐던 항쟁에서 그는 ‘아테네인의 노래’ ‘조국으로’ ‘용기가 있습니까?’ 같은 행진곡들로 대중들의 애국심을 북돋워 주었다. 저항의 절정은 핀란드 제2의 애국가가 된 교향시 ‘핀란디아’였다.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기획된 민족 역사극의 마지막 곡 ‘핀란드여 각성하라’를 개작한 ‘핀란디아’는 지금까지도 즐겨 연주되는 명실상부한 시벨리우스의 대표곡이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교향곡을 통해 민족적인 선율과 정서를 담으면서도 전설적인 서사나 구체적인 표제에 기대지 않고, 교향곡 고유의 형식과 논리만으로 음악을 치밀하게 풀어냄으로써 유럽 청중의 음악적 기대를 충족시켰다. 연이어 나온 ‘교향곡 2번’은 순수한 북유럽풍의 목가로 시작하는 1악장, 단호한 자부심과 불길한 예감의 갈등이 교차하는 2악장, 질주하는 듯한 투쟁을 묘사하는 3악장,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노래하는 피날레 악장까지, 전개가 놀라울 정도로 집약적이고 독창적이라 초연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핀란드 특유의 정서가 듬뿍 담긴 그의 유일한 협주곡으로, 20세기 작곡된 모든 바이올린 협주곡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있다.
작곡가로서는 승승장구했으나 젊어서부터 시작된 잦은 폭음과 방만한 생활은 점점 심각한 후유증을 낳기 시작했다. 수도 헬싱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면서 잘못된 생활습관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인 그는, 넷째 딸 카타리나가 태어난 것을 계기로 울창한 예르벤패의 숲속 투술라 호수 근처에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집을 지어 이사했다. 하지만 장소는 바뀌었어도 음주가 자신의 예술성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아 그는 계속 술을 마셨고 두 딸이 더 태어나자 빚은 더 늘어만 갔다.
결국 시벨리우스는 후두암 진단을 받고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고 베를린까지 가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서야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43살의 이른 나이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은 매우 어두운 ‘교향곡 4번’의 중요한 영감이 되었다. 건강은 회복했으나 시벨리우스가 투병하는 사이 유럽 음악계의 흐름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바레즈, 쇤베르크와 같은 진보적인 혁신가들이 유럽의 음악을 주도하면서, 시벨리우스는 체코의 스메타나와 노르웨이의 그리그처럼 민족주의 작품을 가지고 자국에서만 통하는 2류 작곡가로 밀려난 것이다.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도 그에게는 악재였다. 해외 연주 활동이 중단되고 해외에서 출판된 악보 수입도 국내에서 현금화를 할 수 없어 살림은 갈수록 빈궁해졌다. 1917년에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며 독립한 핀란드가 적백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는 통에 창작 작업 자체가 쉽지 않았다. 시벨리우스 자신이 ‘신과의 씨름’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런 상황에서 작곡은 그에게 일종의 투쟁이자 종교적 수행과도 같았다. 머리까지 삭발하며 결기를 다진 끝에 그는 자신의 건재를 알리는 것에 성공했다. 장엄하고 강렬한 음향과 쾌감 넘치는 선율이 압도하는 걸작, ‘교향곡 5번’을 완성한 것이다.
‘교향곡 8번’ 기대 커지자 늘 “거의 완성”
![시벨리우스와 아내 예르네펠트. [사진 사회평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19/joongangsunday/20251119083647290izfc.jpg)
하지만 7년간 끊었다가 다시 마시기 시작한 술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급기야 1923년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교향곡 6번’을 지휘할 때 만취한 상태로 무대에 등장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래도 술을 끊지 않자 아내가 그에게 초연은 물론 어떤 연주 자리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허사였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그에게 술은 가장 충실하고 이해심 많은 동반자였던 걸까. 오랜 노력과 수정 끝에 탄생한 ‘교향곡 7번’은 그의 교향곡들 중 가장 짧지만 흩어져 있는 악구들끼리 모두 같은 주제로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물리적 시간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웅장함과 광대함을 펼쳐낸다.
화려한 부활 이듬해 60세 생일.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공화국 전체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전국에서 수많은 축하금이 답지했고, 연금도 크게 인상된 덕분에 시벨리우스는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많은 나이였음에도 대중의 사랑과 기대는 식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에게 늘 ‘교향곡 8번’이 언제 나오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거의 완성되었다”는 답을 반복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가 91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을 때 그의 유족들은 “‘교향곡 8번’ 악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빈 ‘음악 명예의 거리’에 새겨진 시벨리우스 이름. [사진 사회평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19/joongangsunday/20251119083647510tbwq.jpg)
시벨리우스의 긴 생애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후기 작품을 “다른 작곡가들이 칵테일을 제조하는 동안 나는 차갑고 맑은 물을 제공했다”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본질적 음악 구성과 태고의 소리에 천착했던 작곡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에게 그토록 목마른 이유가 아닐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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