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1500회 언급됐지만… 결정적 증거 없는 엡스타인 메일
MAGA는 부패한 좌파 엘리트들, 딥스테이트 폭로되리라 기대했지만
트럼프는 7월 이후 MAGA에 “명단 존재는 허구” “에너지 낭비 말라”
민주당 “피해 여성 일부는 비밀유지계약 맺고 합의…기록 모두 공개돼야”
12일 미국 연방하원의 감독ㆍ정부개혁위원회가 성 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2019년 8월 자살)의 유가족으로부터 받은 2만3000여 쪽의 이메일이 공개됐다. ‘트럼프’란 단어가 무려 1500회 나왔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월가의 억만장자 금융가였던 엡스타인이 성 노리개감으로 바친 젊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직접 증거는 없었다.
민주당이 ‘증거’라고 제시한 이메일 3건도 엡스타인이 “내가 트럼프를 끌어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한 것과,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트럼프다. 피해여성(victim)은 내 집에서 트럼프와 수시간 보냈다. 그런데도 트럼프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정도다.
여기서 ‘피해 여성’은 애초 트럼프의 플로리다주 리조트 마러라고에서 일하다가 엡스타인에게 고용된 뒤, 유명 인사들의 성적 착취 대상이 됐던 버지니아 주프리(Giuffre)다. 그는 지난 4월 자살(41세)했고, 지난 달에 자신이 엡스타인에게 ‘마사지 걸’로 고용된 뒤 당한 성적 학대와 감금을 기록한 회고록 ‘아무도 관심 없는 소녀(Nobody’s Girl)’이 출간됐다.

주프리는 이 책에서도 16~17세 때 마러라고에서 일할 때 트럼프를 몇 번 마주쳤지만 “더없이 친절했다”고 했고, 2019~2020년 법원 제출 진술서에서도 “트럼프는 엡스타인의 친구였지만, 그가 내게 부적절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한 번도 나를 성적(性的)으로 공격한 적이 없다”고 했다.
트럼프도 엡스타인과 1990년대까지 어울렸던 것은 시인한다. 그러나 “둘 다 같이 젊은 여성들을 좇아다니던” 시절에도, 엡스타인이 미성년 여성들과의 성관계를 주선하는지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엡스타인이 마러라고 리조트의 젊은 여성 직원들을 빼 가서 관계가 틀어졌고, 2004년 이후엔 얘기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엡스타인은 2019년 1월 한 언론인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트럼프는 길레인에게 (여성들을 빼가는 것을) 멈추라고 했으므로, 당연히 그 (성 착취 희생)소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길레인 맥스웰은 성 착취할 여성들을 꾀어낸 공범이다. 하지만, 12일 공개된 엡스타인 이메일 자료에선 트럼프가 주프리나 다른 미성년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결정적 한 방’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그동안 이른바 엡스타인 파일(file)이 공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온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는 또 엡스타인 관련 모든 수사 서류를 공개하라는 법안이 상임위를 거치지 않고 하원 본회의 투표에 바로 상정되는 것을 막았지만 실패했다. 12일 최소 4명의 공화당 의원이 본회의 상정 청원에 동의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해 정적(政敵)들에 보복하고 권한을 남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해도 확고하게 그를 지지하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도 엡스타인 파일의 완전 공개를 원하면서, MAGA와 민주당이 ‘엡스타인 파일 완전 공개’를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모양새가 됐다”고 전했다.
◇트럼프, 과거엔 “민주당 정부가 엡스타인 ‘고객 명단’ 은폐한다” 주장
그러나 미 연방정부가 엡스타인을 통해 미성년 여성들과 성관계를 한 유명 인사들 명단을 숨기고 있다는 음모론이 애초 확산되는 데에는 트럼프도 큰 기여를 했다.
2015년 2월 트럼프는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강연에서 빌 클린턴에 대해 “괜찮은 사람이지만, 엡스타인의 유명한 섬 때문에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 하나를 사들인 엡스타인의 별장에서 수많은 성적 착취가 자행됐고, 그 ‘고객’ 중에 클린턴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트럼프는 엡스타인과 어울린 민주당 좌파 엘리트들과 이를 은폐하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를 폭로하고 파괴하겠다고 약속했다. J D 밴스 부통령, 팸 본디 법무장관 모두 2024년 대선 승리 전에는 엡스타인 관련 수사 파일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연방수사국(FBI) 국장인 캐시 파텔도 작년 11월까지 수년 간 “이들의 부패한 행위를 트럼프가 완전히 노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인터넷 매체 액시오스는 “음모론을 믿는 MAGA 지지층은 트럼프가 당선되면, 엡스타인과 결탁해 좌파 특권층의 성 범죄가 폭로되리라고 믿었다”고 했다. 로 카나 민주당 하원의원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많은 MAGA 지지자들은 비록 트럼프가 완전하지 못해도, 미국민을 배신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파괴한 썩은 엘리트들을 부수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었기에 그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법무장관 “性고객 리스트, 내 책상 위에 있다”고 말했다가 철회
지난 2월 팸 본디 법무장관이 “엡스타인의 성(性)고객 명단은 내 책상 위에 있다”고 말했다가, 7월에 미 법무부가 “그런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장관의 발언을 철회한 것도 MAGA 진영의 은폐 음모론을 더욱 확산시켰다.
그러자 트럼프는 “고객 명단은 사기(hoax)”라며, 정부가 이 명단을 숨기고 있다고 믿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멍청하다(stupid/foolish)”고 했다. “나를 지지하는 남자들(my boys), 여자들(my ‘gals)에게 도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엡스타인 같은 자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고도 했다.
7월 24,25일 토드 블랑쉬 법무차관이 엡스타인의 공범인 길레인 맥스웰을 인터뷰한 사본이 공개됐다. 맥스웰은 트럼프에 대해 “내가 함께 했던 기간 내내, 트럼프는 누구에게도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모든 면에서 신사였다”고 말했다.
성(性)인신매매로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맥스웰은 1주일 뒤 플로리다주의 연방교도소에서 최소 보안 시설인 텍사스주의 여성 교도소로 이감됐다. 지난 9일 한 민주당 의원은 “맥스웰이 트럼프로부터 사면을 원하고 있으며, 사적(私的) 면담ㆍ컴퓨터 사용 시간 연장ㆍ맞춤형 식사 등 특별 배려를 받고 있다”고 폭로했다.
13일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수 차례 말했듯이, 대통령은 맥스웰 사면을 얘기한 적도 없고, 현재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당 측에선 하원에서 엡스타인 관련 모든 서류를 공개하라는 법안이 표결에 붙여지면, 50명 이상의 공화당 이탈자가 동조할 것으로 기대한다. 민주당 측은 엡스타인이 성적으로 착취한 수십 명의 여성 중 일부는 사건을 합의로 해결하고 ‘비밀유지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고, 전체 수사 파일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만약 공개법안이 부결된다면, MAGA는 ‘기득권 엘리트들은 자신들만의 룰로 움직인다’는 그간의 믿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액시오스는 “엡스타인 파일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초한 난국”이라며 “트럼프는 인플레이션, 2019년 코로나 확산,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이든,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속임수’ ‘사기’라고 반박하며 전투 모드로 돌입하고 화를 내, 측근들조차 이에 대해 묻기를 꺼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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