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가 흔들릴 때, 빛은 길을 만든다”.. 승하 개인전 ‘고요로부터 모든 곳으로’

제주방송 김지훈 2025. 11. 13. 11:24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중심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파동의 시각화
제주시 스튜디오126... 19일까지
빛·물성·내면 구조가 겹쳐 만든 ‘살아 있는 패턴’
승하 작가의 2025 전시 전경 ‘스튜디오126’


전시는 언제나 한 시대의 감각을 드러냅니다.

지금 제주는 잠잠해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미세한 흔들림이 흐르고 있습니다. 승하 작가의 개인전 ‘고요로부터 모든 곳으로’는 바로 그 ‘흔들리는 고요의 전면’을 시각화한 자리로 다가옵니다.

제주시 북성로의 대안공간 스튜디오126이 19일까지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중심에서 바깥으로 확장되는 내면의 궤도를 평면 14점에 펼쳐 놓습니다.

작가가 18년간 주얼리 디자이너로 다뤄온 광물·유기물·굴절의 감각은 이번 전시에서 빛의 조형적 언어로 다시 태어납니다.

■ 고요를 뒤흔드는 미세한 파동

전시는 ‘정적’으로서 고요를 전면 부정합니다.

승하 작가는 “고요는 멈춤이 아니라 다음 파동이 자라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전시장을 채운 레진, 자개, 아크릴, 비드, 큐빅 등의 재료는 모두 빛을 품고 반사·굴절하며, 시각적 파동을 뿜어냅니다.

눈여겨볼 점은 결함 있는 재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스크래치 난 비드, 살짝 금이 간 큐빅, 투명도가 일정치 않은 레진 조각들. 작가는 이들을 정제하지 않고 엮습니다.

이는 단순히 재료 배치에 그치지 않은, 감정과 시간의 퇴적을 존중하는 방식입니다.

상처가 포함된 재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업은, 상실 이후에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느린 회복을 닮았습니다.

이 선택은 메를로퐁티(MerleauPonty)의 ‘보이는 것(le visible)’과 ‘보이지 않는 것(l’invisible)’의 경계가 맞닿는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떨림이, 재료의 결함 속에서 빛으로 드러납니다.

승하 作 ‘Mandala #3’(2022. 리넨에 혼합재료, 72.5×72.5㎝)

■ 만다라, 내면의 구조를 닮은 빛의 순환

작업의 중심에는 ‘만다라(Mandala)’ 구조가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원’과 ‘중심’을 뜻하는 이 도상은 오래전부터 우주와 인간 정신을 시각화하는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융(C.G. Jung)은 만다라를 “무의식이 자아에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생성하는 상징적 이미지”라고 해석했습니다. 작가의 화면은 이 구조를 단순 반복이 아닌, 흔들리는 중심과 비대칭 균형으로 재해석합니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확장되는 패턴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조금 흔들리고, 미세하게 어긋나며, 일정한 규율과 즉흥성이 공존합니다.

이때 화면은 조형이 아닌, ‘살아 있는 중심(living center)’의 움직임을 담는 기록이 됩니다.

들뢰즈(Gilles Deleuze)의 ‘리좀(Rhizome)’처럼, 중심은 순간적으로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치며 저마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합니다. 중심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매 순간 균형을 다시 세우는 동적 구조가 됩니다.

승하 作 ‘lun #1’(2025. 리넨에 혼합재료, 100㎝×100㎝)

■ 관계의 미학, 빛으로 엮인 존재의 리듬

승하의 작업은 재료 조합을 넘어,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의 관점에서도 읽힙니다.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 중 일부는 버려지거나 상품 가치에서 제외된 것들입니다.

그 결함까지 포용해 새로운 질서를 구성합니다.

이때 화면은 한 개인의 내면을 넘어, 타자·기억·물질·시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배치하는 장이 됩니다.

작가가 재료를 고르고 꿰는 행위는, 존재의 파편을 다시 배치하는 감정적·심리적 구성에 가깝습니다.

철학자 팀 인골드(Tim Ingold)가 말한 ‘라인들의 얽힘(meshwork)’처럼, 화면의 곡선과 빛은 서로 얽혀 ‘살아 있는 패턴’을 만듭니다. 빛은 화면 위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시선과 감정 속에서 다시 흔들립니다.

■ 흔들림을 품은 중심, 그 안에서 피어나는 빛

작가는 “균형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조정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전시가 보여주는 핵심 역시 바로 이 지점입니다.

빛은 화면 곳곳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며, 관람자는 그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시 밀려 나오는 완만한 리듬을 경험합니다. 일종의 감각적 명상이자, 내면의 균형을 다시 세우는 조용한 현상학적 체험입니다.

결함이 빛을 품고, 흔들림이 균형을 만들며, 고요가 파동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지점에서 작품은 비로소 시간을 가진 존재가 됩니다.

■ 스튜디오126, 원도심의 ‘조용한 실험실’

전시 공간 스튜디오126(제주시 북성로 27, 2층)은 오래된 상가 건물을 개조해 만든 대안공간입니다. 제주 원도심 속에서 실험적 전시를 지속해왔고, 이번 전시는 제주자치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의 후원으로 열립니다.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가능하며, 일요일은 휴관입니다.

권주희 스튜디오126 대표는 “이번 전시는 시각적 오브제를 넘어 존재의 구조를 탐색하는 시도”라며 “제주라는 장소에서 고요와 빛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 ‘고요’ 이후의 세계로

전시는 완결된 형태보다 흔들림이 남긴 궤적을 드러냅니다. 정지와 움직임, 균형과 이탈이 교차하며 고요는 멈춘 자리가 아니라 다음 흐름을 여는 자리입니다.

빛이 낮게 기울어드는 오후, 작은 전시장에는 미세한 떨림으로 가득합니다.

그 울림은 화면 속 패턴에서 관람객의 내면으로 천천히 스며들며, 잃어버린 중심을 다시 더듬게 합니다.

고요는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파동을 준비시키는 첫 자리입니다.

빛은 그 자리에서 다시, 모든 곳으로 번져갑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Copyright © JI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