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라서 빛났던 운동회… 마당 선뜻 내준 옆집 학교[고맙습니다]

2025. 11. 1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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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맙습니다 - 경운학교 운동회에 운동장 빌려준 교동초등학교
지난달 열린 서울경운학교 운동회.

가을 운동회는 학교의 연중행사 중 으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운동회가 잘 열리지도 않고, 하더라도 예전과 다르게 조용하다. 학년별 또는 2, 3개 학년을 묶어 소규모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 이웃들의 민원 때문이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말을 못하고 남 도움 없이 스스로 생활하기 어려운 장애인 학생들에게 운동회, 소풍, 체험 학습 등은 학교만이 유일한 배움터다. 그럼에도 이들 행사가 줄어들고 없어지는 공교육 여건에 해마다 운동회를 개최하는 학교가 있다. 우리 외손자가 다니는 지적장애 공립 특수학교인 서울경운학교이다.

2002년 3월에 개교하여 초중고, 전문과정 재학생이 149명(남96, 여53), 교직원은 54명(남12, 여42)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가면 운현궁이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 근대사의 유서 깊은 곳이다. 운현궁 옆이 ‘열심히 배우고 익혀 스스로 생활하는 학생’을 목표로 하는 서울경운학교다. 경운학교 바로 이웃에는 서울교동초교가 있다. 학생 수는 두 학교가 비슷하지만 교동초교는 도심에서 보기 드문 반듯한 운동장과 감이 주렁주렁 달린 유실수까지 갖춘 학교로 1894년 9월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경운학교는 지난 10월 17일 금요일 오전 가을 운동회를 개최했다. 장소는 교동초교 운동장이다. 두 집 사이는 담벼락이 없고 키 작은 사철나무가 구분하고 있다. 날씨까지 쾌청해 ‘(우천 시 운동회 장소는 서울경운학교 4층 체육관)’ 괄호 공지가 무색하다. 지난해는 개선문을 통과하는 선수단 입장부터 참석했는데 올해는 도착하니 경기가 이미 시작됐다. 손자는 중학교 응원석에서 사회복무요원 ‘형아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있고, 선생님들은 경기 진행으로 바쁘다. 손자가 할아버지를 보면 산만할까봐 선생님들과는 목례로 ‘유노(가명) 할아버지가 왔소!’를 알렸다. 바쁜 중에도 최아영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손자 시야를 벗어난 뒷자리에서 손자 살피랴 경기 구경하랴 할아버지는 바쁘다. 운동회 진행 사회자는 구면이다. 경기마다 학생들 이름을 타이밍 맞게 크게 불러주고, 청군, 백군 점수판에 눈길이 가도록 은근히 경쟁을 붙인다.

‘큰 공굴리기’는 학생과 선생님, 학부모가 함께 참가하므로 할아버지는 백군에 속한 중학교 2학년 1반 유노와 뒤늦게 상견례했다. 내내 고개만 떨구던 손자 얼굴에 웃음기가 보인다. 며칠 동안 수면 장애와 식사 거부로 ‘피골이 상접한’ 손자는 곧장 할아버지 바지 주머니를 더듬는다. ‘애물단지’ 스마트폰을 찾는 거다. 촉수엄금! 대신 할아버지는 운동회와 안 어울리는 손자가 메고 있는 책가방을 양손으로 받쳐본다. 묵직하다. 사물함에 있어야 할 교과서가 들어 있다. 외부 활동 시 손자가 말(馬)처럼 날뛰는 불상사를 예방하는 고육책(苦肉策)이다.

공굴리기는 양쪽 2줄로 서서 커다란 탱탱 풍선 공을 1회전은 손으로, 2회전은 발로, 3회전은 배치기로 굴려 반환점을 돌아 출발지점에 상대 팀보다 먼저 골인시켜야 한다. 손자도 거들기는 하지만 어른 선수들이 더 용을 쓴다. 왁자지껄 웃다 보니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릴 수 있었던 ‘훌륭한’ 경기였다.

전상희 교장 선생님은 올해도 학생마다 상품이 고르게 돌아가도록 시상식을 푸짐하게 하였다. 쉬지 않고 청군, 백군 깃발을 힘차게 흔든 기수들에게는 더 큰 부상을 안겼다. “경쟁보다는 안전하게 활동에 참여한” 학생과 학부모, SK 봉사자 40여 명, 학교 이웃, 특히 교동초교(교장 김돈회)에 감사 말씀과 함께 90도 절 인사를 드렸다. 두 학교 모두 ‘충실한 교육자’의 수범이었다.

10월 22일에는 서울 중랑구에서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 ‘동진학교’ 기공식이 있었다. 신설 계획이 수립된 이후 13년 만에 첫 삽을 떴다. 여기 경운학교와 교동초교처럼 지역사회와 교육 공동체가 협력해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특수학교의 새로운 미래를 기대한다. 그날 우리 손자에게 데면데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던 ‘인상이 선한’ 사회복무요원과 손자가 검은콩 두유를 안 마시려고 해서 일반 콩 두유로 껍질을 싸서 마시게 한 ‘센스 있고 지혜로운’ 최아영 선생님은 명품 경운학교의 보배이다.

유노 외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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