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 2만 명 중 40%는 15세…어린 동심을 보호해주세요” 몸 불사른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22세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봉제 공장 재단사 전태일(1948~1970)은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기고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한 젊은 노동자가 근로 조건 개선을 촉구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숨졌다는 소식은 이튿날 조선일보 지면에 2단 크기로 보도됐다.
‘13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을지로 6가 17 평화시장 앞길에서 시장 종업원 전태일(23)군이 “노동청이 근로 조건 개선을 적극 협조해주지 않고 있다”고 분신자살을 기도, 중화상을 입고 성모병원에 입원 중 14일 새벽(13일 밤 10시) 숨졌다.
전군은 1시부터 청계천 5가~6가 사이의 평화·동화·통일 등 3개 연쇄상가 종업원 5백여 명과 같이 근로 조건 개선 등 요구 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하려 했으나 경찰과 시장 경비원들의 제지를 받자 가지고 온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댕겼다.’(1970년 11월 14일 자 8면)

정부는 이틀 뒤 해당 업체에 요구를 수용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밝혔다. 이승택 노동청장은 유족을 찾아가 3개 시장 2만7000명 재단사에게 일요일 휴가, 임금 인상, 8시간 근무제, 시간 외 수당 지급 등 8개 항목을 준수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11월 17일 자 7면)
전태일 관련 보도는 계속 이어졌다. ‘분신한 전태일군 어제 장례식’(11월 19일 자), ‘서울·연·고대생, 분신자살 전군 교정서 추도식’ ‘노동청 담당 국장 직위 해제’ ‘근로 조건 개선 요구 움직임에 서울법대 종강’(11월 21일 자), ‘전태일 분신 특별조사 위원회 신민당서 구성’(11월 24일 자) 등이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2년 차 기자 이상현은 전태일이 쓴 일기장을 입수해 11월 22일 자 주간조선에 단독 보도했다. 그중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글이 있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제품(의류)에 종사하는 5년 경력의 재단사입니다. 저희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 의류 전문 계통으로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물론 근로기준법에 해당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 종업원(2만여 명)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 여성입니다. 하루 15시간의 작업은 너무 과중합니다. 2만명 중 40%를 차지하는 보조공(시다)들은 15세의 어린 사람들입니다. 저 착하디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여 주십시오.”

고등공민학교 중학부를 중퇴하고 16세에 평화시장에 들어갔던 전태일이 남긴 편지 글은 너무도 논리 정연하고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특종 보도한 기자 이상현은 “일기장이 대서특필로 전격 공개되자 정부와 세상은 침묵하게 되었고, 평화시장 일대에 대대적인 개선 조치가 단행되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1999년 8월 5일 자 21면)고 회고했다.
전태일 일기장은 자서전 형식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저자는 인권 변호사 조영래(1947~1990)라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전태일보다 한 살 위인 조영래는 1965년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했다. 1971년 사법시험 합격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자가 되어 도피하면서 ‘전태일 평전’을 썼다. 1990년 12월 12일 별세 후 전태일이 영면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다.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일기에 썼다. 조영래는 그런 친구였다. 친구는 또 있었다. 서울대 법대생 장기표(1945~2024)는 전태일 분신 직후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로 달려갔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장기표를 보고 “태일이가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 친구가 이제야 나타났구나” 감격해했다. 장기표는 전태일 분신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전태일 동생 전순옥은 1989년 영국으로 유학해 2001년 11년 5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을 연구해 학위 논문을 썼다. 외환 위기 후인 1999년 유학 비용 마련이 어려워 학업 중단 위기에 몰렸다는 기사(1999년 3월 19일 자 29면) 이후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전순옥은 귀국 후 인터뷰에서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은 더 이상 맞지 않다. 바깥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면서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한 운동이 된 게 아닐까. 오빠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사회에서 정말 소외된 노동자였어요”(2001년 11월 13일 자 9면)라고 말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양대 노총으로 대변되는 조합원들의 소득은 우리 사회 상위 10%, 최소 50%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절반은 그 바깥에 있다”면서 “전태일은 재단사, 그러니까 중간 관리자였다. 마음만 먹으면 사장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봤다”(2024년 1월 29일 자 A28면)고 지적했다.
전태일재단은 2024년 3월 5일부터 조선일보와 함께 10회에 걸쳐 ‘12대 88 사회를 넘자’ 시리즈를 공동 기획 연재했다. 이 시리즈 기사는 2025년 제56회 한국기자상 기획 보도 부문을 수상했다.
전태일 일대기를 담은 1995년 개봉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그해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감독상·촬영상 3개 부문을 받았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은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2009년 만해대상을 받았다. 전태일은 50주기를 하루 앞둔 2020년 11월 12일 노동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국민훈장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음식도, 술도 추가주문할 거라면 “Open a tab!”
- 걷기·러닝 전 해보세요… 착지가 달라지는 3분 루틴
- 본업은 기자, 부업은 작가… ‘기레기’ 말고 ‘기작가’가 되볼까
- 중국은 왜 이란 전쟁에 침묵하나… “정권은 버리고 석유는 챙긴다”
- “한국은 태평양의 전초기지”... 한미동맹이 바꾼 미국의 군사 지도
- [굿모닝 멤버십] 이란과 친했던 중국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 “이제 나도 물러날 때가 됐나봐…” 회장이 물어보자 솔직히 대답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 [바로잡습니다] 3월 25일 자 C7면 ‘고흥, 우주항공산업진흥원 유치 총력전’ 외
- 40년간 줄어든 학생 수… 사북 ‘유도부’가 뒤집어
- 與, ‘현금 제공 의혹’ 김관영 전북도지사 제명